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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엄격해진 ‘신의칙’ 적용···기아차 통상임금 노조 승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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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해 미지급 임금을 달라며 사측을 상대로 낸 소송의 항소심에서 법원이 1심과 마찬가지로 노조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사측은 노조 요구가 회사의 경영에 중대한 어려움을 초래해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위반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근로기준법은 노동자의 기본적 생활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버팀목이기에, 쉽게 예외를 인정해선 안된다고 판단했다.

22일 서울고법 민사1부(재판장 윤승은 부장판사)는 기아차 노조 소속 노동자 2만7378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원금 기준으로 노조가 청구한 금액 6590여억원 중 3126여억원이 인정됐다. 이자까지 합치면 사측이 노조에 지급해야 할 돈은 대략 4600억원대로 추산된다.

기아차 노조는 2008년 8월부터 2011년 10월까지 사측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한 게 잘못됐다며, 정기상여금을 포함시킨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따진 연장·야간·휴일 근로 수당을 줘야 한다며 소송을 냈다. 근로기준법은 연장·야간·휴일 근로 수당은 통상임금의 50% 이상을 가산하라고 정하고 있다.

경향신문

22일 기아자동차 노조가 사측을 상대로 낸 통상임금 소송 항소심에서 일부 승소한 뒤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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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쟁점은 노조의 청구가 ‘신의칙’ 위반인지 여부였다. 신의칙이란 권리 행사, 의무 이행에 ‘신의’를 강조하는 민법 2조 1항의 원칙이다. 대법원은 2013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는 노사 간 합의는 효력이 없다면서도 예외적으로 노조의 추가수당 요구가 회사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면 신의칙에 따라 요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사측은 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인용하면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한 것은 노사합의에 따른 조치인데 이를 깨는 것은 신의칙에 어긋난다”며 “통상임금 범위를 넓혀 추가로 수당을 지급하려면 최대 3조원의 부담이 생기고 기업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고 재판 과정에서 주장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동일하게 사측 주장을 배척했다. 재판부는 “회사의 당기순이익, 매출액, 동원 가능한 자금의 규모, 보유하는 현금과 금융상품의 정도, 기업의 계속성과 수익성에 비춰 볼 때 노조의 임금 청구로 인해 회사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되거나 기업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노동자의 추가수당 청구가 신의칙에 위반되는지 여부는 ‘신중하고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는 지난 14일 대법원 판결을 언급하며 “신의칙을 적용해 근로자의 임금청구권을 제약하는 것은 자칫 근로자의 권리에 관한 헌법과 근로기준법의 기본 정신을 거스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업 노조인 기아차 노조원은 중소기업 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일한다. 이런 이유로 임금 청구가 부당하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재판부는 근로기준법의 취지대로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노조의 보호를 받는다는 이유로, 평균적인 근로자보다 많은 임금을 받는다는 이유로 쉽게 예외를 인정할 수는 없다”며 “원고들(노조)의 요구가 과도하다는 지적이 있기는 하지만 근로자의 개별적인 사정에 따라 예외를 인정하는 방법으로 근로기준법의 규범력을 떨어뜨릴 경우 정작 보호받아야 하는 근로자가 제때 보호받지 못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재판부는 부양가족이 있는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가족수당과 중식비에 대해 1심과 달리 일률적으로 지급되지 않았다면서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항소심에서는 1심이 인정한 원금에서 가족수당과 중식비가 차지하는 1억원가량이 빠졌다.

노조는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환영의 입장을 밝혔다. 노조 측을 대리한 김기덕 변호사는 “사측이 더 이상 신의칙을 이유로 임금 지급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즉각 판결을 비판하는 입장을 냈다. 경총은 “약속을 깨는 한쪽 당사자의 주장만 받아들여 기업에게만 부담을 지우는 것으로 심히 유감스럽고 승복하기 어렵다”며 “기아차 뿐 아니라 다른 국내 자동차 생산회사들도 통상임금 부담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고 국가적으로도 자동차산업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을 간과한 채 현실과 동떨어진 형식적 법 해석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혜리·남지원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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