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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김창길의 사진공책] 목숨 건 네 컷, 인간 절멸의 증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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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자 미상,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 아우슈비츠 앨범, 27 May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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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들의 입에는 똑같은 말이 담겨 있었다. ‘지옥’이라는 단어. 생존자 필립 뮐러는 “단테의 지옥은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했다”고 증언했다. ‘아우슈비츠’라는 지옥. 폴란드 남부의 작은 도시 아우슈비츠는 특정 장소를 알려주는 지명의 의미를 넘어선다. ‘홀로코스트’의 대명사.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지휘하에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이 집행된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등의 절멸수용소들은 사라졌고, 러시아의 붉은 군대가 해방시킨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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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or June 1944, Auschwitz II-Birken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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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첫 미명에, 약 2500구의 시체가 쌓여 있던 두 구덩이에 불이 지펴졌다. 두 시간 후, 그들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작열하는 불길이 완전히 타고 말라버린 수많은 몸통을 뒤덮었다 … 송풍기로 인해 열기가 유지될 수 있던 소각로에서 일어난 것과는 반대로, 구덩이들에서는, 반대로, 인간 재료가 불에 탔을 때, 연소는 공기가 시체들 사이에서 흐르는 한에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체더미가 오그라드는 경향이 있어서, 외부로부터의 공기 유입구가 전혀 없을 때에는 내가 속해 있던 화부(火夫)팀은 끊임없이 시체더미에 기름, 메탄올, 또는 끓고 있는 인체지방을 뿌려야 했다.”(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레베카, 22쪽)

“유대교 찬송은 불리지 않을 것”이라며 홀로코스트의 증거들을 인멸했던 나치 친위대 SS(슈츠슈타펠·Schutzstaffel)가 가장 신경 썼던 말소 작업은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의 제거였다. 직역하자면 ‘기이한(sonder) 특공대(kommando)’인 존더코만도는 SS를 대신해 인간 절멸 작업을 수행했던 수감자들이다. 아우슈비츠의 존더코만도였던 필립 뮐러는 “구덩이 구역 내 철조망 너머의 감시탑에 있던 SS 보초들은 자신들이 그 증인이었던 단테적 스펙터클로 인해 꽤 고통스러운 것 같았고, 자신들 앞에서 전개된 그토록 끔찍한 장면들의 광경을 참기가 많이 힘들었다”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했다.

1942년 7월4일 처음 선발된 존더코만도의 임무는 슬로바키아 유대인들의 샤워실 호송이었다. 물 대신 값싸고 성능 좋은 치클론B(독가스)가 나오는 샤워실. 존더코만도가 되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다. SS에게 존더코만도로 선택된 포로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살 아니면 복종이었다. 유효기간이 끝난 존더코만도의 최후도 다른 포로와 동일했다. 후임 존더코만도의 첫 입회 의식은 선임 존더코만도의 시신들을 소각하는 것이었다. 시기별로 300명에서 900명 넘는 인원의 존더코만도가 부역했다. 개별 존더코만도의 임무 수행 기간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존더코만도 포로들도 ‘유예된 망자’일 뿐이었다. SS는 존더코만도를 특별 관리했다. 존더코만도는 그들 이외의 어떤 외부 세계와의 접촉도 금지돼 있었다. 가스실과 소각로의 실체에 대해 모르는 다른 SS들의 접근도 차단됐다. SS는 막대한 양의 술을 존더코만도에게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이 SS가 베푸는 인간적인 호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SS는 그들이 시키는 일만 묵묵히 해낼 수 있는 좀비 같은 존더코만도가 필요했을 뿐이다. 동료였던 포로들은 그들을 ‘화장터의 까마귀’라 비난했다.

“이 일을 하게 되면 첫날 미쳐버리든가 아니면 익숙해지든가 둘 중 하나다.”

“나는 스스로 죽거나 죽임을 당하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고 싶었다. 복수하기 위해 그리고 증언하기 위해. 여러분은 우리가 괴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단지 훨씬 더 불행할 뿐.”

생존 존더코만도의 증언을 아우슈비츠 회고록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돌베개)에 기록한 또 다른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그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다만 아우슈비츠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존더코만도를 평가할 자격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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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 촬영자 미상, 아우슈비츠 제5소각로 가스실 앞 야외 화장 구덩이, 1944년 8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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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 촬영자 미상, 아우슈비츠 제5소각로 가스실 앞 야외 화장 구덩이, 1944년 8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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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 촬영자 미상, 아우슈비츠 제5소각로 가스실로 이동하는 포로들, 1944년 8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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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 촬영자 미상, 아우슈비츠 제5소각로 자작나무 숲, 1944년 8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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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4일 아우슈비츠에서 긴급 서한이 발송됐다. 수신인은 크라쿠프의 폴란드 레지스탕스 조직원 ‘Tell’(암호명). 봉투에는 치약 튜브 속에 숨겨져 있던 필름이 봉인돼 있었다.

“긴급. 가능한 한 빨리 6×9 필름 두 통을 전달해주시오. 사진이 찍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스실로 가는 수감자들을 보여주는 비르케나우 사진들을 보냅니다. 사진 한 장은 소각로가 모든 시체들을 태울 수 없을 때 사용하는 외부 화장터들 중 한 곳을 보여줍니다. 앞에 있는 것들은 불구덩이에 던져질 시체들입니다. 다른 사진은 그들 표현대로라면 샤워하기 위해 수감자들이 옷을 벗는 숲속의 한 장소를 나타냅니다. 가스실로 가겠죠. 가능한 한 빨리 필름들을 전파해주시오 … 사진을 확대하면 파급력이 더 클 것이라 생각됩니다.”(존더코만도의 사진들, 위키피디아)

프리모 레비는 1944년 8월의 날씨가 무더웠다고 기억했다. 뜨거운 열기가 혈관 속의 피를 걸쭉하게 만들 정도였다. 인간 절멸 작업은 날씨와 상관없이 집행됐다. 존더코만도는 특공대 비밀 작전을 펼쳤다. 양동이 바닥에 숨겨진 카메라가 존더코만도에게 전달됐다. 사진기를 손에 잡은 것은 ‘알렉스’라고 알려진 그리스 해군 장교였다. 다비드 슈믈레프스키 등 나머지 4명의 존더코만도는 SS의 동태를 살폈다.

찰칵! 첫 번째로 찍힌 사진의 초점은 명확하지 않다. 검은 테두리 너머로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연기가 나는 곳을 향해 무언가를 끌고 가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알렉스는 다시 셔터 버튼을 눌렀다. 초점은 잡혔다. 하지만 카메라에 달린 렌즈는 망원이 아니었다(동료 한 명은 카메라를 라이카로 기억했다). 긴급 서한의 지침대로 사진을 확대해서 살펴본다. 화장터의 까마귀들 밑에 쌓인 수평의 더미는 시신들이다. 자작나무 숲에서 찍힌 세 번째 사진은 심하게 기울어졌다. 무리의 사람들은 옷을 벗고 있는 듯한 몸동작을 하고, 알몸으로 보이는 세 사람은 좌측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머지 한 컷에서 보이는 것은 나무들과 하늘뿐이다.

아우슈비츠를 기록한 사진은 많다. 나치는 정밀했던 조국의 광학 기술로 절멸수용소의 모습들을 스스로 기록했다. SS 장교 칼 회커가 찍은 100장이 넘는 아우슈비츠의 모습들은 평화로운 풍경이다. 나치에게 절멸수용소란 그런 풍경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칼 회커의 사진들이 가장 끔찍하다며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것은 관객의 편안한 감상평일 뿐이다. 현재진행형으로 인간 절멸의 순간이 포착된 아우슈비츠의 유일한 사진은 존더코만도의 자화상이다. “너희들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SS의 협박은 성공했다. 생존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존더코만도가 선택한 것은 ‘그들이 존재했음’을 남겨놓는 일이었다.

존더코만도의 자화상은 아우슈비츠 발송자의 요구대로 사람들의 모습이 확대된 형태로 나치의 만행을 고발했다. 하지만 미술사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원본 그대로의 사진으로 아우슈비츠를 상상할 것을 주문한다. 시신을 소각하는 두 장의 사진에서 잘려나간 검은 테두리는 사진 촬영자의 위치를 말해준다. 가스실이다. 사진에 찍힌 불태워지는 시신들은 촬영자가 있던 곳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역광으로 현상된 어두운 가스실은 캄캄한 방 ‘카메라 옵스큐라’를 떠올리게 만든다. 카메라 옵스큐라 속에서 미지의 사진가가 셔터 버튼을 눌렀다. 희뿌연 연기의 형태로만 절멸수용소를 벗어날 수 있는 아우슈비츠의 참상이다.

세 번째 사진은 좀 더 긴박한 사태를 현상한다. 미지의 사진가는 좀 더 대담해졌다. 몸을 숨길 수 있는 가스실의 어둠 속을 빠져나와 자작나무 숲으로 이동했다. 가시권 안에 SS 대원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사선으로 기울어진 구도는 몰래 숨긴 카메라로 재빠르게 촬영할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을 알려준다. SS 대원이 사진가의 존재를 알아차렸던 것일까? 하늘과 나무줄기만 찍힌 마지막 사진은 사진가의 공포가 포착돼 있다. 네 컷이 찍힌 시간은 15분에서 30분가량.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이 사진들을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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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 사진1 크롭 및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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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 사진2 크롭 및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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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7 : 사진3 크롭 및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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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해방된 관객>, 현실문화)라고 표현했다. 랑시에르는 존더코만도의 사진 네 컷이 걸렸던 2001년 파리에서의 전시 ‘수용소의 기억’에 대한 논란을 정리했다. 전시회 도록에 실린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평론에 대한 논박이었다. 엘리자베트 파누는 너무 실재적인 이미지들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 비판적 거리두기를 방해한다고 비평했다. 파누의 지적은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한다는 미국 평론가 수전 손택의 사진에 대한 통찰과 연결된다. 존더코만도의 사진가로 자신을 투사한 관객들은 잠시 동안 아우슈비츠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전율한다. 하지만 관객은 사진 속의 포로들처럼 연기의 형태로만 아우슈비츠를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에서 시선을 돌리기만 하면 관객은 언제든지 아우슈비츠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평화로운 전시회의 관람객에게 고통을 주는 이미지는 특별한 구경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제라느 바쥬만도 재현된 현실의 무게를 강조한 디디-위베르만의 평론에 반대했다. 바쥬만은 존더코만도의 사진이 “쇼아(재앙)의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쇼아 사건의 핵심에는 재현 불가능한 것, 그러니까 이미지 안에 구조적으로 고정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바쥬만의 반론에 한참을 고민했던 나는 다시 생존자의 증언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98쪽)

절멸수용소는 말 그대로 인간을 절멸시키는 살육 공장이었다. 이 때문에 아우슈비츠를 재현하는 것은 가스실로 끌려간 자들, 프리모 레비의 말을 빌리자면 ‘가라앉은 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가라앉았다. “가라앉기 전 그들에게 종이와 펜이 있었다 한들 그들은 증언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레비는 회고록에 적었다. 가라앉을 운명의 그들은 이미 “관찰하고, 기억하고, 가늠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잃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쇼아 사건의 핵심에는 재현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바쥬만의 분석은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바쥬만의 생각은 나치의 기획과 연결됐다. 존재와 실상에 대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절멸수용소를 나치는 기획했다. 재현 불가능하다며 아우슈비츠에서 물러나는 게으름은 나치의 기획을 완성하는 것이다.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는 이런 나치의 기획을 살아 있는 동안 폭로했다.

“그들(가라앉은 자) 대신, 대리인으로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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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garian Jews from the Tet ghetto arriving at Auschwitz II, May/June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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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대의 재앙에 대해 함부로 혀를 놀리는 관객들이 있다. 지난 8일 국회에서 열린 5·18 진상규명 대국민 공청회에 참석한 자유한국당 의원의 발언이라고 한다. “1980년 5월 전남도청 앞에서 수십, 수백명이 사진에 찍혔는데 ‘북괴군이 아니라 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의 사진 독해 능력이 고작 이런 수준이다. 잔인했던 광주의 기록에 ‘비통함’ 대신 ‘북한 개입’이라는, 병치시키기에 불가능한 사유를 전개시킬 수 있는 용감한 국회의원의 지성이란!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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