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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생뚱맞은 대한민국 보물, 그리스 청동투구는 왜 박물관에 서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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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기증유물전시관에 전시중인 청동투구. 서양유물 중 유일하게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돼있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2층 기증유물전시관을 가보면 왠지 생뚱맞은 유물 1점이 전시돼있다. 이름하여 ‘그리스 청동투구’(보물 제904호)이다. 언필칭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보(336건)와 보물(2150건) 중에서 외국에서 발굴된 서양 유물이다.

1875년 에른스트 쿠르티우스(1814~1896)가 이끄는 독일 고고학팀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조사하다가 다른 수많은 전쟁유물과 함께 발굴했다. 그러니 엄연한 그리스 유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도 “서구 유물로는 유일한 지정문화재(보물 제904호)”라고 소개했다.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소개를 종합하면 ‘이 청동투구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코린트에서 제작한 것으로, 고대 그리스 올림픽 제전 때 승리를 기원하면서 신에게 바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높이 21.5㎝ 가로 18.7㎝의 크기이며, 기원전 6세기 유물로 평가됐다. 투구를 머리에 썼을 때 두 눈과 입이 나오고 콧등에서 코 끝까지 가리도록 만들어졌다. 머리 뒷부분은 목까지 완전히 보호하도록 되어 있다.

이 청동투구는 1987년 3월7일 보물로 지정됐다. 2월3일 보물지정에 앞서 열린 문화재위원회는 “청동투구가 고대 그리스 신전이나 기념비 등에서 보이는 부조(돋을새김)의 무사상에서나 형태를 찾아볼 수 있는 무기류”이므로 “서구의 무기발달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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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고대 올림픽이 열린 그리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에서 독일 고고학자 쿠르티우스가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청동투구를 발굴했다. 여기서 찾아낸 청동투구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땅에서 발굴된 2600년전 유물이 왜 이역만리인 대한민국의 보물이 되었으며, 어떻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구 전시되고 있을까. 문화재위원회는 ‘그리스제 청동투구’의 유래와 그것을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한 으뜸 사유를 밝혀놓았다.

“청동투구는 기원전 6세기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에서 고대 올림피아 제전 경기 때 승리를 기원하고 감사하는 뜻으로 봉납하기 위해 그리스 코린트에서 제작됐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에게 부상으로 수여하기로 했지만 전달되지 못하고 베를린 박물관에서 계속 보관해오다가 1986년 손기정 선수에게 반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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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16일 동아일보. 그리스 신문사가 청동투구를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에게 선물하려 했지만 아마추어리즘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소식이 실려있다. 신문은 대신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이름을 새겨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통해 독일의 베를린 박물관에 기증됐다고 보도했다.


■뜨거웠던 1936년 8월

보다 구체적인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시간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이 열리던 1936년 8월 9일로 되돌려보자.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10만 관중의 열기만큼이나 유난히 뜨거웠던 이날 오후 3시쯤, 출발신호와 함께 27개국 56명의 마라토너가 일제히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당시 우승후보로 꼽힌 선수는 1932년 LA 올림픽 우승자인 후안 카를로스 사발라(아르헨티나)와 어니스트 하퍼(영국) 등이었다. 그러나 초반부터 치고나온 선수가 있었으니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24살 청년 손기정(1912~2002)이었다. 손기정이 추반부터 질주하자 우승후보였던 하퍼가 “슬로, 슬로”를 외쳤다. 영국신사 답게 경쟁자인 손기정의 오버페이스를 걱정해준 것이다. 손기정은 손을 들어 화답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앞으로 나갔다. 반환점을 돌 무렵에는 또다른 조선의 마라토너 남승룡이 최하위 그룹에서 8위로 도약했다. 앞서 나가던 강력한 우승후보 사발라는 30㎞ 지점에서 쓰러졌고, 손기정은 하퍼를 따돌리며 독주했다. 손기정은 마침내 1위로 골인했고, 남승룡도 3위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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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18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쾌거에 전국에서 성금이 답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러나 자칫 감격에 겨워 보내는 금품이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아마추어 자격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기사는 급기야 “이번에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에게 기증해달라던 서력 기원전 투구도 이마추어 선수에게 물품을 전달하는 것이 금물이라 하여 그 투구에 손기정 군의 이름만을 새겨서 베를린 박물관에 보관하기로 한 것을 보더라도 아마추어 선수권 문제가 얼마나 엄격한 알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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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신문들은 보름 이상 민족 자긍심과 민족혼을 일깨우는 기사로 도배질했다. 축하전보와 선물접수명단을 앞다퉈 발표했고 각지의 축하행사를 낱낱이 보도했다. 조선중앙일보과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은 큰 파문을 일으켜 관련자들이 줄줄이 연행됐고, 조선중앙일보는 끝내 휴간하고 말았다.

■‘아마추어리즘에 어긋나므로…’

그런데 그 와중이던 8월16일과 18일 동아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연속으로 실렸다.

16일자 신문에 실린 ‘서기 600년전 고대 희랍의 투구 손군에게 기증신청’이라는 기사를 보자.

“올림피아 발상지인 희랍의 최대신문 라테이니 사장은 백림(베를린) 올림픽 마라손 우승자에게 최근에 발견한 서력 기원전 600년 시대 고대 희랍의 화려한 투구를 기증할 뜻을 국제올림픽위원회에 신청하여 보냈다. 그런데 위원회에서는 아마추어에게는 금품을 주거나 받거나 하는 것을 절대로 금지하는 규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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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8월17일 동아일보. 그리스가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에게 준 청동투구를 일제가 의붓자식 취급해서 전달하지 않았다는 기사. 그러나 동아일보는 이미 1936년 8월 아마추어리즘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독일 베를린박물관에 기증됐다는 기사를 두번 연속으로 실은 바 있다.


기사가 언급한 ‘희랍의 최대신문’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발행되던 브라디니 신문사를 일컫는다. 이 신문사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부상으로 주려고 최근에 (쿠르티우스 조사단이) 발굴한 청동투구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맡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투구는 애초부터 손기정 선수에게 전달될 수 없었다. 금품을 주고받는 행위는 올림픽정신인 아마추어리즘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투구는 영구히 백림(베를린) 박물관에 보관하고 우승자의 씨명을 새겨 두기로 하여 본대회 마라손 우승자인 우리의 손기정 선수의 성명 석자가 뚜렷이 새겨 있게 되었다.”(동아일보 1936년 8월16일자)

결국 투구에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이라는 이름을 새기고 베를린 박물관에 영구히 보관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는 기사였다. 그런데 이 기사는 ‘올림픽 아마추어리즘’이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기자주(記者註)’를 덧붙여 놓았다.

“(기자주) 아마추어라는 것은 직업선수가 아니라는 것으로서 이 아마추어에서는 소모될 물품이거나 금전을 수수하지 못한다. 오직 대회명을 조각 혹은 염색한 영구 기념할 컵이나 메달, 기, 트로피 등의 표창 방법에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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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22일 다시 손기정씨가 청동투구를 되찾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다. 이때 독일의 박물관에 전시중인 청동투구 모습을 게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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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받을 수 없었던 선물

이틀 뒤인 18일자 동아일보는 더욱 흥미로운 청동투구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쾌거에 전국에서 성금이 답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사는 감격에 겨워 보내는 금품이 자칫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아마추어 자격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선수에게 금품을 전달하는 것이 양군(손기정·남승룡)의 아마추어 선수권을 상실케 할 우려가 있다. 뿐만 아니라 양군의 장래와 조선운동계의 장래에 한 암영(어두운 그림자)을 던지는 것인 동시에 순결한 운동정신을 상실케하지나 않을까 기우가 없지 않다.”

기사는 실제로 분란(芬蘭·핀란드)의 육상영웅 파보 누르미가 금품수수 때문에 1932년 LA 올림픽 출전이 금지됐다는 사실 등 여러가지 사례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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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지인에게 보낸 엽서. 그저 세단어로 ‘슬푸다!!?’라고만 써놓았다. 우승의 기쁨도 잠시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로서 슬픔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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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자바라(사발라·마라톤)도 남미 원정 레이스 도중 그의 동족들이 준 원정비가 문제 되어 한동안 여론이 비등했던 것이 우리의 기억에 아직 새로운 바이다. 이태리의 베카리(루이지 베칼리)도 LA올림픽에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뒤 그의 조국 이태리에서 연금을 주기로 했다가…아마추어 선수권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철회했으며….”

기사는 급기야 ‘이번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에게 기증해달라던 서력 기원전 투구도 이마추어 선수에게 물품을 전달하는 것이 금물이라 하여…’라면서 청동투구 이야기를 꺼낸다.

“그래서 그 투구에 손기정 군의 이름만을 새겨서 백림(베를린) 박물관에 보관하기로 한 것을 보더라도 아마추어 선수권 문제가 얼마나 엄격한지 알 것이다.”

동아일보 기사를 종합하면 손기정 선수에게 주려던 그리스제 청동투구는 올림픽 정신인 아마추어리즘을 위배한다는 이유로 ‘그리스 브라디니 신문사→국제올림픽위원회(IOC)→독일올림픽위원회→베를린박물관’ 순으로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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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 이중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 형식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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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의붓자식 취급해서’ 못찾았다?

그런데 해방 후인 1946년 8월17일자 동아일보에는 좀 이상한 기사가 실린다. 손기정씨가 마라톤 제패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다가 ‘청동투구를 찾아달라’고 동아일보에 요청했다는 것이다.

“마라톤 발상지 희랍에서 올림픽 때마다 가장 대표적인 마라톤 종목 우승자에게 대리석대 위에 승리의 투구를 얹어 우승자의 이름·연대·기록을 조각해서 전달하는데 우리 손기정 군에게 조각을 다했으니 찾아가라는 목록과 사진이 송달되어 왔건만 일본이 의붓자식 취급하여 전쟁 중 흐지부지 오늘에 이르렀는데…”

이에 동아일보는 “즉시 미군정 하지 중장을 통해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이 뜻을 전달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동아일보 기사에는 청동투구에 ‘올림피아드, 베를린 1936년 기정 손, 타임 2시간 29분 19초2’라고 조각한 대리석 사진을 첨부했다.

한가지 이상한 것은 1936년 8월 당시 한바탕 화제를 뿌렸을 법한 그리스 청동투구 기증 이야기를 당사자인 손기정씨가 전혀 몰랐다는 점이다. 물론 베를린 현지에서, 또한 귀국 후에도 한동안 정신없이 지낼 때였으므로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신문 기사들을 본 어느 누구도 손기정 선수에게 귀띔해주지 않았다는 말인가. 또 ‘손기정 이름을 새긴 청동투구를 찾아가라는 내용의 편지와 사진을 보내왔는데 일제가 의붓자식 취급해서 흐지부지했다’는 동아일보 기사는 어떨까. ‘아마추어리즘 때문에 손기정 선수에게 전달될 수 없어서 IOC를 통해 베를린박물관으로 갔다’는 1936년 8월16·18일 기사는 어찌된 것인가.

그 사이 브라디니 신문사나 혹은 IOC나 혹은 독일올림픽위원회나 혹은 베를린 박물관 측이 방침을 바꿔 손기정 선수에게 “청동투구를 찾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는 말인가. 뭔가 쉽게 납득이 가지않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간헐적으로 보도된 ‘청동투구’ 사연

손기정씨는 이후 청동투구의 행방 관심을 갖고 수소문 했던 것 같다. 손기정씨는 1956년 베를린에서 열린 군인육상대회 때 (청동투구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독일 사람들이 ‘모든 박물관 유물을 전란을 피해 소개(疏開)시켰다’하는 바람에 더이상 알아보지 못했다.(손기정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그 후 20년이 지난 1975년 3월22일 손기정씨가 청동투구를 찾고 있다는 기사가 또 동아일보에 실렸다.

기사에 붙은 사진은 청동투구가 어느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기사는 “전시대에 조각된 설명문을 판독해보니 ‘그리스 코린트 시대의 투구/마라톤 우승자를 위해 아테네의 브라디니 신문사가 제공한 기념상/제11회 베를린 올림픽 1936년/손기테이(기정의 일본 이름)/일본/12시간 29분 19초’라는 독일어였다”고 전했다.

그런데 이 전시사진은 어떻게 손기정씨에게 전달되었을까.

기사는 “투구의 전시모습을 담은 이 문제의 사진은 베를린 올림픽 이듬해(1937년) 일본 육상협회가 여러 올림픽 기념 사진과 함께 아무런 설명없이 손씨에게 보내준 것”이라 전했다. 손기정씨는 이 기사에서 “일본측이 이 사진을 왜 보냈는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손씨는 기사에서 “청동투구를 찾아 우리 민족의 기념품이 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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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 꼭 50년만에 손기정 선수의 품으로 돌아온 청동투구, 독일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 정신과 ‘손기정씨와 베를린 시와의 깊은 유대관계’에 따라 청동투구를 돌려주기로 결정했다”며넛 청동투구를 돌려주었다.


■독일교포가 발품을 팔아 찾아낸 청동투구

청동투구의 반환은 이때의 기사를 본 독일교포 노수웅씨의 끈질긴 노력이 힘입어 급물살을 탔다.

노수웅씨는 1년 반 동안이나 청동투구가 전시되어 있을법한 독일내 박물관을 백방으로 훑고 다니다가 마침내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국립박물관에 전시중인 청동투구를 확인했다.

“서베를린 슈로스가 1번지 샤를로텐부르크 박물관 전시함에 놓인 투구는 26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청록색 녹을 쓰고 원형 그대로의 우아한 모습을…. 박물관측이 가장 아끼는 보물이라 한다.”(손기정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에서)

그러나 청동투구의 반환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약탈문화재조차도 돌려주지 않은 유럽의 박물관들이 아닌가.

그런데 약탈문화재도 아니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혹은 독일올림픽위원회를 통해 전달된 청동투구를 쉽게 내주겠는가. 그리고 40년 넘게 가만있다가(혹은 모르고 있다가) 이제와서 돌려달라는 것이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손기정씨는 백방으로 뛰었다. 아무래도 청동투구의 원래 주인이었던 그리스측을 움직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아테네 신문대학원 교수이자 한국-희랍 친선협회 회장인 타티스 파파야노폴로스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타티스를 통해 브라다니 신문의 체육부장이었던 카피초글루에게 1936년 당시의 상황도 전해들었다.

1936년 당시 브라디니 신문사의 사장인 아라반티노스가 당시 그리스 집권자인 요안니스 메탁삭스(1871~1941)로부터 마라톤 우승자에게 기증한다는 조건으로 투구를 얻어냈고, 정식으로 반출허가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된 아마추어리즘 때문에 청동투구는 시포로스 스피라돈 루이스 그리스 선수단장(제1회 아테네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의 손을 거쳐 독일 올림픽조직위원회(혹은 올림픽위원회)로 기증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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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투구는 돌려받았지만 지금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올림픽 메달리스트 명단에는 손기정(금메달)과 남승룡(동메달) 선수의 이름이 기테이 손과 쇼류 난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남아있다. 한번 더럽혀진 오욕의 역사는 쉽게 지워질 수 없는 법인가 보다.


■파란만장한 역정 걸었던 청동투구

독일올림픽위원회로 기증된 청동투구의 후일담이 속속 밝혀졌다.

1936년 6~8월 사이 두달간 베를린 고대박물관에 전시됐다가 1939년 제2차세계대전 발발로 베를린 방공호로 이전했다가 종전 이후 소금광산~프랑크푸르트 지하금고~비스바덴 미군 주립박물관~헤센주~베를린을 거쳐 1960년부터 서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박물관에 정착했다. 청동투구 역시 파란망장한 역정을 걸은 셈이다.

하지만 유물을 소장중인 독일측이 끝내 고집했다면 ‘주인 품으로의 반환’은 어려웠을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았던 손기정씨의 반환 노력이 결국 결실을 맺었다. 베를린 올림픽 50주년을 맞은 1986년 독일(서독) 올림픽위원회가 손기정씨에게 “청동투구를 돌려주기로 했다”는 서한을 보낸 것이다.

서한은 “올림픽 정신과 ‘손기정씨와 베를린 시와의 깊은 유대관계’에 따라 청동투구를 돌려주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그해 9월 22일 청동투구는 꼭 50년 만에 주인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손기정씨는 감격에 겨워 “금메달을 두 번 받은 격”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그렇게 돌아온 청동투구는 실제 고고학 조사에서 발굴된 생생한 그리스제 유물인데다 손기정 선수라는 역사성, 상징성이 덧붙여져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그리스는 왜 국보급 유물을 내줬을까

그런데 지금 이 순간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그리스는 왜 실제 발굴조사에서 찾아낸 국보급 유물을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려 했을까. 그것도 정부 차원이 아니라 일개 신문사(브라디니) 사장에게 반출허가까지 내주었을까.

사실 정확히 ‘왜’ 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청동투구와 관련되어 여러가지 이야기를 추론할 뿐이다.

이 청동투구가 발견된 곳은 고대 올림픽 경기가 발생된 그리스 서남단 페르포니소스섬에 있는 제우스 신전이었다.

따라서 올림픽 발상지에서 발굴한 청동투구를 마라톤 우승자에게 전달함으로써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신에게 물려받은 것이므로 더욱 단련하는 것이 신을 숭배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고대 올림피아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아닌게 아니라 고대 올림픽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성대한 개선식을 치렀다. 그들에게는 특권이 주어졌고, 물질적 보상과 상품도 받았다.

예컨대 아테네에서는 가장 고귀하고 혁혁한 공훈을 세운 시민을 접대하는 귀빈관에서 무료 식사가 제공되었다. 우승자에게는 일생 동안 세금 면제의 특전이 주어졌다. 공공장소에 세워둔 기념 석주에는 그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다른 예로 기원전 416년과 412년 스타디온 경주에서 2회 연속 우승한 엑세이네토스는 가장 영향력있는 시민 300명의 수행을 받으며 4두마차를 탄 채 아크라가스(시칠리아섬 남서부에 있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로 개선했다. 올림피아 제전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은 실제로 많은 지역에서 식민지의 장군이나 지휘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런 고대올림픽의 전통을 따라 제1회 아테네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그리스의 스피리돈 루이스(1874~1940)는 귀금속을 무료로 받고 이발소에서 무료로 수염을 깎을 수 있는 특권을 받기도 했다.

■마라톤 우승자의 특권

또 기원전 490년 벌어진 마라톤 전투는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첩으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 전사자는 불과 192명이었지만 페르시아군의 피해는 6,400명에 달했다. 그리스 용사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 전장에서 아테네까지 약 40㎞를 단숨에 달려 승전보를 알리고 숨졌다는 일화를 기념한 스포츠종목이 바로 마라톤이다.

마라톤 전투는 특히 창과 방패, 갑옷, 투구 등으로 중무장한 그리스의 소수정예병이 이끈 승리였다. 문혜경 제주대교수(서양사)는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전 7세기부터 4세기 중반까지 주된 전투방식은 창과 방패, 청동갑옷과 투구, 단검, 정강이 받침 등과 같은 무구를 갖춘 중무장보병 전투였다”면서 “청동투구 역시 그리스 남성성의 상징이었다”고 말했다.

또 제우스 신전에서 청동투구를 발굴한 고고학자 쿠르티우스는 근대올림픽 운동을 싹틔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고대 올림픽 발상지인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발굴한 쿠르티우스는 “고대 올림피아의 제전이야말로 그리스문화의 근원이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이 견해는 근대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쿠베르탕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일각에서는 독일에서 수학한 경력이 있는데다 이탈리아 뭇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을 모방했던 당시 메탁시스 그리스 총리를 주목하기도 한다. 독일은 당시 다른 발칸반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최대무역상대국이었다. 그렇다면 메탁시스가 나치독일이 개최하는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실제유물인 청동투구를 기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여러가지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스가 마라톤 우승자에게 청동투구라는 실제유물을 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리스 정부 차원에서 주면 될 것을 왜 특정 신문사가 반출했는지 속시원한 설명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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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름은 지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기테이 손’이라는 우승자를 알리면서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가 일제치하에서 일본 이름으로 대회출전을 강요당했다는 설명문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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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남은 이름, ‘기테이 손, 쇼류 난’

어쨌거나 손기정 선수에게 전달되지 못한 청동투구가 50년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금 이 순간 어엿한 대한민국 보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이 있으니 바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금메달리스트 역사에 남아있는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이름과 국적이다. 즉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공식 기록에는 아직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와 동메달리스트를 ‘코리안(KOR) 손기정과 남승룡’이라고 하지 않고 ‘일본 국적(JPN)의 기테이 손과 쇼류 난’이라고 표기해놓고 있다.

‘손기정’과 ‘남승룡’의 이름을 회복하려 했지만 공식기록을 바꿀 수 없다는 IOC의 방침에 따라 아직까지 성사시키지 못했다.

다만 10여년 전부터 ‘기테이 손’의 프로필 세부내용에는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가 일제 치하에서 일본 이름으로 대회출전을 강요당했다는 내용의 설명문이 달려 있다. 이 정도라도 엄청난 진전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그 오욕의 역사를 완전히 지울 수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기환 선임기자 http://leekihwa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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