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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ESC] ‘김대중·노무현의 펜’ 강원국 작가 “관심받는 게 좋은 나는 ‘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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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강원국의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

최근 알은체하는 이 많아

관심받는 거 좋아하는 나, ‘관종’

본래는 남 의식 많이 하는 사람

내 글을 쓰면서 눈치 안 보게 돼

“누구나 말하고 쓸 때 가장 나답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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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 작가만큼 글쓰기를 재미있게 안내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요?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연설비서관으로 일한 경험을 담은 <대통령의 글쓰기>를 시작으로 <회장님의 글쓰기>, <강원국의 글쓰기> 등 글쓰기 3부작을 펴낸 베스트셀러 작가면서, 방송 출연으로 부쩍 친숙해졌죠. 그가 이번에는 무게는 털고, 재미는 더한 글쓰기 안내 글로 독자님을 2주에 한 번씩 찾아갑니다. <편집자 주>

한겨레

나는 ‘셀럽’이다. 남들이 그렇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거리에서나 커피숍에서 내가 모르는 그 누군가가 알은체를 한다. 내게 인사를 하거나, 사진을 찍자고 하거나, 사인해달라고 한다. 그런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만나는 날은 없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난다. 설사 알은체를 안 해도 나는 안다. 눈빛만 봐도 그가 나를 알아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럴 때는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맞다’고 말해주고 싶다.

누군가 알아보면 기분이 좋다. 그런 사람을 ‘관종’(관심 종자)이라고 한다.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관종이다.

내게 관심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첫마디에 따라 유형을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어렴풋하게 아는 부류이다. “티브이(TV)에 나오신 분 맞죠?” “혹시 대통령 연설 쓰신…” 이분들은 내 이름을 모른다. 오지랖이 좀 넓을 뿐이다. 온라인에서 나를 아는 분들도 있다. “<한겨레> 파파이스 보고 팬 됐습니다.” “페이스북 친구예요.” “블로그 이웃입니다.”

다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분들이다. “노무현 대통령님 연설비서관이시죠?” “저도 ‘노사모’입니다” 끝으로, 내 책의 독자다. “책에 사인받아야 하는데…” “<대통령의 글쓰기> 책 집에 있어요.” “지금 <강원국의 글쓰기> 읽고 있어요.”

모두 반갑고 감사하지만, 마지막 부류가 가장 고맙다. 내게 인세를 주셨을 뿐 아니라, 가장 깊숙이 나와 교감하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본시 관종은 아니었다. 아니 정반대였다.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눈길 끄는 것을 싫어했다. 눈총받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한마디로 눈치를 심하게 봤다. 눈치 본다는 뜻은 무엇인가. 그 의미는 나를 보면 분명해진다.

첫째, 나는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읽기, 듣기에 능하다. 남의 생각을 잘 읽는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 누군가 한마디 하면 그렇게 말하는 배경, 맥락, 취지, 의도, 목적을 잘 파악한다. 하지만 말하기, 쓰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말은 실어증에 가까웠다. 과묵하고 진중하다고 칭찬받았다. 회장이나 대통령의 글을 쓰는 것은 쓰기가 아니다. 읽기, 듣기다. 잘 읽고 잘 들어야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읽기, 듣기는 받아들이는 것이고, 말하기, 쓰기는 내놓는 것이다. 나는 잘 받아들이기만 했다.

둘째, 나는 남에게 잘 맞춰주는 사람이다. 어렸을 적 내 별명은 ‘됐어요’였다. 나는 요구하거나 주장하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냐고 물으면 됐다고 했다. 옷 사줄까?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물으면 됐다고 했다. 늘 그랬다. 그런 내게 사람들은 양보를 잘하고 남에 대한 배려심이 있다고 했다. 천만의 말씀이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다. 남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다. 입안에 혀처럼 굴어야 남들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셋째, 남의 평가에 기대 사는 사람이다. 칭찬을 갈구한다. 혼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지적받지 않기 위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산다.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시킨 일을 잘해야 한다.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러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여기에 길들여지고 맛 들이면 시키지 않은 일도 찾아서 한다. 말하지 않은 것도 의중을 헤아려 갖다 바친다. 그러면서 양심을 잃어간다. 양심은 자신이 스스로를 평가하는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다. 나에 대한 평가를 남에게 의탁하고 살면 양심은 필요 없다. 내가 모신 분들이 나쁜 일을 시켰거나, 내가 그런 일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아마 나는 했을 것이다. 칭찬받기 위해서, 혼나지 않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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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남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았다. 누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어느 책에 이렇게 쓰여 있더라고 전하며 살았다. 나만의 관점, 시각, 해석이 없었다.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박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늘 동조했다. 묻어가고 따라갔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건 맞지 않습니다.” 정의감? 언감생심이다. 기회주의자에 가까웠다. 눈치를 보느라 다른 편에 빌붙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남들의 힘으로 좋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제 나는 말하고 쓰면서 산다. 읽기, 듣기도 하지만 내 말을 하고 내 글을 쓰기 위해 한다. 읽기, 듣기가 목적이 아니다. 내 말과 글을 위한 수단이다. 남의 눈치도 안 본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역량에 부치는 일은 못 하겠다고 한다. 매일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어제의 글보다 오늘의 글이 낫다. 스스로 대견하다. 내일은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로 오늘도 쓴다.

여전히 관종이지 않느냐고? 그렇다 관종이다. 관종과 눈치 보기는 한 끗 차이다. 내가 중심이고 주체이면 관종이고, 내가 주인이 아니고 누군가의 대상이고 객체이면 눈치 보기다. 말하고 쓰는 사람은 주체이고, 읽고 듣는 이는 대상이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쓴다. 내 말과 글이 나인데, 말하고 쓰지 않으면 누가 나를 알겠는가. 스스로도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더 이상 투명인간처럼 살고 싶지 않다. 말 잘 듣고 남의 비위 맞추며 살기 싫다. 내 말과 글을 더 많은 사람이 듣고 읽기를 원한다. 그들 또한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누구나 말하고 쓸 때 가장 나답다.

지난달 경남 진주에 있는 경남과학기술대에 강의하러 왔다. 점심 먹으러 근처 국숫집에 갔다. 식탁이 3개뿐인 작은 식당이었다. 40대 초반 여주인에게 곱빼기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나를 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니나 다를까 음식을 갖다 주며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시죠?” 한다. 국수를 먹고 있는데 밑반찬을 계속 챙겨주신다. 국수를 마시듯 목에 흘려 넣었다. 식당을 나와 영수증을 봤는데 4천원만 계산했다. 곱빼기 값이 아니라 보통 값을 받은 것이다. 이분의 마음이 느껴졌다. 울컥했다. 다시 들어가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하나? 마음 같아서는 뭐라도 사다 드리고 가고 싶다. 그러나 강의시간이 다 됐다. 아무튼 처음 받아보는 ‘연예인 디시(DC)’였다.

한겨레

강원국(<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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