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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발자취] 日 학병 탈출해 광복군 입대한 '金九의 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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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김우전 선생 별세

조선일보

생전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던 김우전 전 광복회장의 모습. 그는 "민족정기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선 독립유공자와 유족에 대해 예우가 충분히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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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출신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를 지낸 애국지사 김우전(金祐銓·98) 선생이 20일 오전 7시 별세했다.

192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생전 인터뷰를 통해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조선일보에 근무한 형이 고초를 겪는 모습을 보면서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키웠다”고 전했다. 일본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법학과 재학 중 재일 학생 민족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조선민족 고유문화유지계몽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1944년 1월 일본군에 징병돼 중국으로 파병되자, 부대를 탈출해 그해 5월 광복군에 입대했다.

그는 광복군 제3지대 소속으로 미국 제14항공단 연합군 연락장교로 파견됐다. 1945년 3월 한·미공동작전계획(OSS 훈련)에 따라 미군 OSS(국방부 전략지원사령부) 본부에서 광복군 무전 기술 교재와 한글 암호문을 제작하고, 국내 독립운동가와의 연락 임무 등을 수행했다. 같은 해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기요(機要) 비서(기밀을 다루는 주요 비서)로 임명돼 활동했고 해방 후 귀국해서는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 비서로 일했다. 1948년 김구 선생이 남북 협상에 참여할 때도 수행했다. 고인은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나서 항복했을 때 기뻤지만 허탈하기도 했다”며 “광복군으로서 국내로 진격하지 못한 것 때문에 늘 쓸쓸한 마음을 안고 있다”고 했다.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2001년에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고, 1992년 광복회 부회장, 1999년과 2015년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2003년 광복회장을 맡았다. 2003년 2월 광복회장 취임 이후 2004년 4월까지의 월급 전액과 본인의 독립유공자 연금을 합친 돈 5000만원을 독립유공자 손자녀 지원용 장학금으로 쾌척하기도 했다. 당시 장학금을 내며 “민족 정기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독립유공자와 유족에 대한 예우가 충분히 이뤄져야 하는데 불행히도 현실은 국가 차원의 지원에 한계가 있어 개인적으로나마 보훈 가족들을 돕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2004년 12월에는 제6회 인제인성대상 수상금 2000만원을 광복회와 정주장학회 장학금으로 전액 기탁했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선배와 동료·친구들은 현충원에 많이 있다”며 “통일 조국을 보지 못하고 간 선배와 동료를 생각하면 아쉽다”고 했다.

‘1948년 남북협상에 대한 역사인식의 부족과 왜곡’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의 공동작전에 관한 연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 선전포고에 관한 역사 재조명’ ‘한국광복군의 OSS 특공작전’ 등 다수의 논문과 ‘김구 통일론’ ‘김구 선생의 삶을 따라서’ 등의 저서를 남겼다.

유족으로는 아들 동제(목사)·용제(미국 거주)씨, 딸 인숙·애라씨, 사위 조동성 국립인천대 총장이 있다. 빈소는 서울중앙보훈병원, 발인은 22일 오전 7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02)2225-1004

[양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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