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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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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울면 어때요, 돌아다녀도 괜찮아요” 공연계, 어린이에 러브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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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그레고리 스미스가 작곡한 '오케스트라 게임'은 오케스트라 편성 악기들이 서로 경주한다는 스토리에 따라 악기 음색을 하나씩 차례로 들려준다. 롯데콘서트홀은 '오케스트라 게임'에 맞는 애니메이션을 자체 제작해 2017년부터 '키즈콘서트'로 선보이고 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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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공연은 조명이 어두워서 아이들이 졸리다고 해요. 공연이 길어지면 지겨워하고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공연이니까 아이가 확 몰입하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지난해 7세 딸과 함께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키즈 콘서트’를 본 이소영(41)씨의 후기다. 이씨가 준 공연 점수는 별 다섯 개 중 다섯 개. 아이에게 클래식 공연을 보여 준 건 처음이었지만, 아이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신데렐라 구두의 디테일까지 살필 정도로 집중했다.

2017년 시작한 ‘키즈 콘서트’는 애니메이션과 클래식 음악을 결합한 어린이 특화 공연이다. 악기 캐릭터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무대 정면에 깔리고, 애니메이션 스토리에 맞춰 음악이 연주된다. 연주곡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발레 모음곡 ‘신데렐라’와 그레고리 스미스의 ‘오케스트라 게임’이다. 공연이 끝나면 관람객들이 악기를 만지고 연주해 볼 수 있다. 이씨 아이는 공연을 보고 나서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린이는 미래의 공연 관객이다. 어릴 때부터 음악과 연극, 무용을 자연스럽게 접하면 공연 관람을 ‘삶의 당연한 일부’로 여기게 될 가능성이 크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공연에 공연계가 힘을 쏟는 이유다. 어린이 공연이 그저 유치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 공연 수준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클래식 음악과 어린이는 상극일까. 요즘은 그렇지 않다. 공연계가 관람객 나이 제한의 벽을 조심스럽게 낮추는 것이 한 사례다. 클래식 공연은 보통 ‘8세 이상’, 어린이 공연은 ‘48개월 이상’이어야 관람할 수 있다. 공연장이 시끄러워지는 걸 걱정해서다. 최근 들어 “아이가 공연 중에 울어도 된다”며 문을 활짝 연 공연들이 나왔다. 클래식 공연기획사 크레디아는 애니메이션 ‘핑크퐁’ 속 노래를 오케스트라 연주로 선보이는 공연을 기획하면서 관람 연령을 ‘24개월’ 이상으로 대폭 낮췄다. 두 돌 갓 지난 아이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걸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부산시립교향악단의 클래식 공연 ‘키즈 웰컴 콘서트’는 관람객 나이 제한을 아예 없앴다. 크레디아 관계자는 “클래식 관객층을 넓히는 것은 장기적으로 클래식계의 이익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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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아우라코 무용단의 작품 '메-메'. 36개월 이하의 아이들이 참여하는 공연이다. 무용수들은 아이들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즉흥적인 안무를 만든다. 아이들은 관객인 동시에 무용수인 셈이다. 아우라코 무용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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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역시 어린이와 청소년 관람객의 불모지였다. 발레 작품에 쉬운 해설을 곁들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무용계도 얼마 전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지난해 스페인 안무가 엔리케 카브레라를 초청해 워크숍을 열었다. 카브레라는 ‘유럽 아동 공연예술 축제’에서 최우수상을 세 차례 받는 등 어린이 공연 분야 선구자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카브레라에게 어린이 관객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 그 성과를 담은 공연이 올해 말 공개된다. 현대무용가 이경구가 안무를 맡았고, 이탈리아 인터랙티브 시어터 컴퍼니인 TPO가 참여해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는 공연’을 준비 중이다. 국립현대무용단 관계자는 “8세 이하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작품을 만드는 게 목표”라며 “기술적 제한이 없다면, 공연 중에 아이들이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국립오페라단도 지난해 가족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을 제작한 것을 비롯해 어린이 관객을 위한 작품 개발에 적극적이다. 롯데콘서트홀은 ‘키즈 콘서트’의 새 레퍼토리를 내년에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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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무용단의 어린이 작품에 협업할 이탈리아 인터랙티브 시어터 컴퍼니 TPO의 공연 모습. TPO는 풍부한 색감이 돋보이는 이미지와 영상을 활용한 공연으로 전세계 어린이 관객과 만나온 공연단체다. TPO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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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공연은 어린이 특수를 부른다. 가족이 함께 공연을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획사 입장에선 티켓 판매에 유리하다. 예술경영지원센터와 BC카드 빅데이터센터가 전국 공연가맹점의 BC카드 이용 자료를 분석해 지난해 발간한 ‘공연트렌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공연 티켓을 신용카드로 구입한 사람 중 신혼 부부와 영유아가 있는 가구(37%) 비중이 가장 높았다. 초ㆍ중ㆍ고 자녀가 있는 가구(24%)가 뒤를 이었고, 1인 가구는 16%였다. 아이가 어릴수록 공연 관람 수요가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내 어린이 공연 대부분이 어린이날이나 방학 특수를 노리고 일회성으로 기획되는 것은 여전한 한계다. 영미권에선 가족과 학생들을 위한 콘서트가 상시적으로 열리고, 대형 극장들이 어린이 레퍼토리를 매년 발표한다. 영국 런던의 대표적 클래식홀인 위그모어홀은 1세 미만의 영유아를 동반할 수 있는 ‘크라잉 아웃 라우드’ 콘서트를 2008년부터 시작했다. 북유럽에는 어린이를 위한 공연 축제가 활성화돼 있다. ‘아피나 축제’ ‘브라보 어린이 국제 축제’ 등이 열리는 핀란드에선 1950년대부터 어린이 무용 레퍼토리를 만들었고, 20개가 넘는 어린이 전문 무용단이 활동 중이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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