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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돌봐주자니 힘들고 외면하자니 미안하고…할마·할빠들 황혼육아 ‘딜레마’ [연중기획-행복사회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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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다니는 자식 생각해 시작했는데… ‘육아 굴레’에 갇히다

세계일보

“아유∼ 당연히 힘들지! 정신적으로도 힘들고 몸도 예전 같지 않아. 어차피 손주도 내 자식이고 일하는 우리 딸 생각해서 봐줘야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힘든 건 어쩔 수 없어. 나이 앞에 장사 없다니까. 그래도 재영이(손자·가명) 돌봐주기 전에는 나도 일을 했으니까 밖에 나다니고 여행도 다니고 그랬는데, 집에 온종일 붙어있게 됐으니 그것도 고역이야 아주. 둘째 손주? 어휴 말도 마. 지수가 안 낳는다고는 하는데, 내가 둘째까지 봐줄 자신이 없네. 그걸 다시 하라고? 못할 것 같아.”

강민정(62·여·가명)씨는 19일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자신의 ‘황혼육아’ 경험을 구구절절 쏟아냈다. 2016년부터 약 16개월간 ‘할마(할머니+엄마)’로 지낸 강씨는 자신의 ‘자녀 숙제’를 끝내고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던 차에 맞이한 ‘2회차 양육’이 주는 부담감을 토로했다. 한마디로 “안 돌봐주자니 미안하고, 돌봐주자니 너무 힘들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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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도와줘야”… 힘든 할마·할빠

‘황혼육아 딜레마’는 비단 강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건복지부의 ‘2017 어린이집 이용자 만족도 조사’에 따르면 어린이집 등·하원 전후로 부모 이외 혈연관계 양육자가 있는 아동은 26%이며, 이 중 96%가 조부모인 것으로 나타났다. 2016년 국책연구기관 육아정책연구소 조사에서도 맞벌이 가구의 조부모(기타 친인척 포함) 육아 비율은 63.6%로 아이돌보미(5%)나 베이비시터(5.4%)보다 현저히 높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조부모가 육아의 주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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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모들이 황혼육아 전선에 뛰어드는 이유는 이를 성인 자녀에 대한 사랑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다. 지난해 미래에셋은퇴연구소가 발표한 ‘5060세대의 가족과 삶’ 보고서를 보면, 현재 손주를 양육 중이거나 과거 양육 경험이 있는 275가구(중복 응답)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황혼육아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자녀(부부)가 직장생활을 하게 도와주려고’라는 응답이 절반 가까운 48%에 달했고, ‘자녀가 혼자 아이를 양육하는 게 안쓰러워서’라는 응답(16.7%)이 뒤를 이었다.

조부모들은 황혼육아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체력적 한계를 꼽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체력적 한계(55.6%)를 가장 많이 꼽았고, 내 시간 사용 제약(49.8%)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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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육아 갈등도… “정책적 지원 필요”

양육 스트레스로 황혼육아에 대한 인식도 변하고 있다. 성인 자녀의 양육 부탁을 비자발적으로 들어주던 이전의 ‘관행’이 최근 들어 좀 더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싶은 욕구와 건강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거절하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가족복지학회의 지난해 12월호 학회지에 실린 논문 ‘손자녀 양육지원을 거부한 조모의 경험에 관한 연구’(김은정 한양여대 교수)에 따르면 2016년 경상북도 도내 60세 이상 1000명에게 물은 결과 10명 중 6명(61.1%)꼴로 ‘내가 힘들면서까지 손주를 돌볼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 양육 수고비가 주어진다고 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김은정 교수(아동보육복지학)는 조부모들이 황혼육아를 꺼리는 이유로 본인의 안위 외에도 양육에 따른 가족 간의 갈등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가 자녀의 손주 돌봄 요청을 거절한 7명의 조부모를 심층면담한 결과 거절 이유로 △양육 방식을 두고 자녀와 싸울까 봐 △육아에 치중해 부부관계가 악화할까 봐 등을 꼽았다. 이미 황혼육아를 경험한 주변 이웃이나 동년배들의 사례를 봤을 때 가족 갈등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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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의 이유로 자녀의 돌봄 요청을 거절했지만 부모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면담자 7명 모두 ‘엄마는 딸을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와 같은 성인 자녀의 섭섭함을 맞닥뜨리면 미안한 심정이 들었다고 진술했다. 부동산중개업에 종사하는 면담자 A(66·여)씨는 “내가 손주를 못 봐준다고 하니 나중에 한참 지나고 아들이 나한테 ‘엄마, 나는 솔직히 그때 우리가 (봐달라고) 얘기 꺼내기 전에 엄마가 알아서 먼저 봐주겠다 그러실 줄 알았어. 그런데 못 봐주겠다고 딱 말해서 좀 섭섭했어요’라고 말하는데, 참 미안하고 마음이… 두고두고 안 좋더라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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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국가의 정책적 지원으로 황혼육아를 줄여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김영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통화에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는 말이 있다. 문재인정부가 ‘낳기만 하면 다 키워주겠다’고 공언했지만, 그게 안 되기 때문에 황혼육아가 늘어나는 것”이라며 “현재 초혼 연령이 30대 중반이고 점점 늦어지는 추세인데 나중에 이들이 황혼육아를 한다면 70대 이상일 텐데 과연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김 연구위원은 “어쩔 수 없이 황혼육아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성인 자녀는 조부모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업무시간’을 명확하게 정해줘야 할 것”이라며 “육아 과정에서 조부모와 성인 자녀의 끊임없는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동수 기자 samenumbe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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