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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만나는 여성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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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맞아 여성 독립운동가 재조명하는 문화계 움직임 활발



경향신문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은 2월 8일 서울 정동 배재어린이공원에서 ‘항일독립운동여성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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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3월 1일. 일제가 강점한 한반도는 물론 세계 곳곳의 한인 거주지역에서 시민의 자발적 저항운동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3·1운동이 확산되면서 1919년 4월에는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수립됐다. 헌법에도 명시할 정도로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가 뿌리를 두고 있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100주년을 맞는 만큼 문화계에서도 공연을 비롯한 기념사업 및 행사 열기가 뜨겁다. 특히 관객의 눈길을 끄는 부분은 그동안 잘 부각되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점이다.

그동안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해온 흐름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분기점이 있었다. 해방 이후부터 독립운동가로 명망이 높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숨겨져 있던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재평가를 받는 경우, 그리고 사회주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독립운동을 했지만 분단 이후 월북했다는 등의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다 뒤늦게 빛을 본 경우다. 이런 맥락에서 3·1운동 및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활발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조명은 새로운 흐름인 셈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100년 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라진 상황에서 시대적 한계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통해 여성들이 주체적 입지를 다진 출발점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융·복합 무용극을 표방하는 <여성독립운동가열전>은 이러한 흐름을 잘 반영한 공연이다.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남성 중심 독립운동사에서 보조적인 역할만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진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한국적인 음악과 춤, 당시 영상과 사진자료를 활용해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인 이은숙 여사(1889∼1979)가 대표적이다.

이 여사는 우당과 결혼 2년 만인 1910년 12월 해외에서 독립운동의 터전을 일구겠다는 각오로 낳은 지 1년도 안된 딸을 안고 온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했다. 당시 우당을 비롯한 고성 이씨 집안 6형제는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막대한 돈을 들여 독립운동을 지원했기 때문에 집안 살림을 맡았던 이 여사의 어려움은 더 커졌다.

주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살림을 꾸려가는 녹록지 않은 삶의 모습은 그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에 자세히 담겨 있다. “하루 잘해야 일중식(日中食·점심 한끼)이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절화(밥을 짓지 못함)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생불여사(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이나 비슷한 곤궁)로다”라고 회고록에 적을 정도였다. 이런 환경에서도 이 여사는 수시로 집에 방문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융숭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결국 이 여사는 여성이라는 장점을 활용해 직접 국내로 들어와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아낙의 모습을 하고 한반도와 간도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이다. 이 여사는 “매일 빨래하고 만져서 주야로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란 겨우 20원가량 되니,…우당장(이회영)께서는 무슨 돈인 줄도 모르시면서 받아쓰시니 이렇게 해서라도 보내 드리게 되는 것만도 나로서는 다행일 뿐”이라고 자금 확보와 전달과정에서의 어려움을 기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우당에 비해 이 여사는 지난해 광복절에야 건국훈장을 받았다. 부부 모두의 독립운동이 후세의 평가를 받기까지 56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감시가 덜한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맡은 점은 정정화 여사(1900~1991)의 독립운동 활약상도 비슷하다. 정 여사는 중국과 한반도를 오가며 10여년 동안 임정의 자금모금책이자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이은숙 여사가 간도에 자리잡은 독립운동 세력의 살림꾼 역할을 했다면 정정화 여사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임시정부 전반의 안주인 역할을 맡았다. 중국에 망명한 27년 동안 김구, 이동녕 등 임정요인 및 그 가족들을 돌보는 일을 도맡는 한편, 1940년에는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고 1943년 대한애국부인회 훈련부장이 되는 등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수용하는 대신 주체적인 활동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정 여사 역시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당대에는 알려졌지만 후대의 재평가는 뒤늦었다. 해방 후 미군정의 홀대 때문에 1946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한 데 이어 오랫동안 함께 활동했던 김구 선생이 암살되며 정치적 입지가 축소된 탓이다. 한국전쟁 중 남편인 김의한 선생이 납북되면서 남한에 남은 정 여사는 부역죄로 투옥되기도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1982년에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을 정도로 해방 후 일생이 순탄치 못했지만 생전에 훈장을 받고 회고록도 남겨 이번 <여성독립운동가열전> 등의 공연에서도 생생한 이야기가 담겼다.

유관순 열사 외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크게 주목받지 못한 한계는 유관순 열사의 스승이었던 김란사 여사(1872~1919)가 본명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점에서 잘 나타난다. 창작 노래극인 <100년 후, 꿈꾸었던 세상>이 기리는 김란사 여사는 그동안 남편의 성이 붙어 ‘하란사’로 이름이 잘못 알려지는 등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던 인물이다. 김 여사는 일제강점기 이화학당 학생단체인 ‘이화문학회’를 지도하면서 유관순 열사에게 이문회 가입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진행한 구체적인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김 여사는 1916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총회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는 한편 고종의 지시로 1919년 6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승인받도록 열강들을 설득하는 특사로도 활동했다.

김 여사가 고종의 특사로 해외를 누비다 중국 베이징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기까지 활동하는 모습은 인천시립극단과 무용단, 교향악단, 합창단 등 4개 예술단이 합동 공연하는 이번 공연에서 재구성돼 무대에 오른다. 김 여사의 생애를 중심으로 역사의 그늘에 가려졌던 여성들의 독립운동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주제의식이 담겼다.

최원종 연출가는 “독립운동 관련한 많은 자료를 모으고 작가적 상상력을 대입하면서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한편, 동시대성도 살릴 수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 김란사 여사에게 주목했다”며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외에도 전면에 나서지 못한 채로 역사 속에 묻힌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점이 연출 의지를 북돋웠다”고 말했다.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총망라하는 작업은 학술연구를 통해 진척되고 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가 3·1운동 및 임정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하는 <여성독립운동가 인명록>, <나는 여성이고, 독립운동가입니다> 등의 관련 서적이 출간을 앞두고 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심옥주 소장은 “특히 작년과 올해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공적을 인정받고 발굴되었지만 아직도 무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너무 많다”며 “발굴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여성 독립운동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성 독립운동 연구센터 건립 등 국가적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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