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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타인의 손가락질에 자기 혐오부터 배워…지금은 나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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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에 한국의 스쿨미투 알린 스물두 살 양지혜 씨

경향신문

‘학생의날’이었던 지난해 11월3일 중·고교생들이 참여한 집회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당시 사용했던 팻말을 양지혜씨가 광화문 거리에서 들어보이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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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돌림의 기억 | 중3 때 쓴 글엔 ‘괴물이 된 느낌, 왜 미움받는지 모르지만 너희를 미워할 수 없다’ …혐오 즐기는 학교문화, 악의 있어야만 가해자인 건 아냐

스쿨미투 1년 | ‘용화여고 포스트잇’으로 공론화됐지만, 어떤 학교는 고발자 색출에 학생들 외로운 싸움…중징계 교사 15명은 교단 복귀하기도

유엔 초청 방문 | 유엔아동권리위에 ‘스쿨미투 보고서’ 제출 뒤 연락 와…한국 정부에 철저한 조사·대책 마련 등 권고해달라 요청


소녀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늘 ‘외모품평’을 받았다. 중학생 시절엔 외모로 따돌림도 당했다. 교사가 나누어준 가정통신문을 뒤로 넘기는데 뒷자리 학생은 자신이 건네준 것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경멸’의 의미였다. 가끔 장난을 걸어오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 ‘놀이’ 속에서 자신은 ‘추녀’ 역할이었다. “야, 쟤 남자친구로 어때?” 지목된 남학생은 표정이 일그러졌고 소녀는 어쩔 줄을 몰랐다. 아이들은 웃어댔다.

교사의 통제 속에 모두들 입시만을 향해 내달리는 학교. 그 공간에서 아이들은 대개 혐오와 차별의 놀이를 즐겼다. ‘나는 이 공간 바깥의 사람이야’라는 감각이 늘 따라다녔다. 고3 여름, 그는 대학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회원들과 함께 입시거부 선언을 했다.

그 후 4년이 흘렀다. 졸업한 해에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청페모)이란 단체를 만들었다. ‘이제는 성평등을 배우고 싶다’ 문화제와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집회 등을 치렀고 다양한 세미나를 열었다. 지난해 4월부터 학교에서의 성폭력·성희롱을 고발하는 ‘스쿨미투’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는 고발자들을 서로 연결하고, 그들이 용기 내어 대중 앞에서 말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개인적으로는 아르바이트 등으로 돈을 벌어 자립했다.

지난 4~9일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에도 다녀왔다. 지난해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 스쿨미투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초청을 받은 것이다. 1월부터 ‘스쿨미투, 유엔에 가다’라는 캠페인을 통해 전국에서 유엔에 제출할 서명을 받았다. 이때 모은 후원금과 5000여명이 참여한 소셜펀딩으로 여비를 마련했다.

지난 4년을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또 해석할 줄 알게 된 시간”이라고 말하는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활동가(22)를 지난 13·14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 여성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를 묶은 책 <걸 페미니즘(공저)>에 실린 자기소개가 인상적이었어요. ‘양지혜: 나의 몸을 ‘잘못’으로 알고 살다가 페미니즘을 통해 스스로의 몸을 긍정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심지어 ‘여성 초등학생’조차 이래야 해,라는 게 있었어요. 예쁘고 밝은 모습이요. 저는 집이 가난했고 그렇게 밝고 예쁜 아이가 될 수는 없었어요. 제 몸에 대해 ‘혐오’하는 감각부터 배운 것 같아요. 중학생 때는 외모 때문에 따돌림도 받았고요. 중3 때 글을 한 편 썼는데, ‘내가 괴물이 된 느낌이다, 왜 미움받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난 너희들을 미워할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어요. 담임 선생님이 그 글을 종례시간에 읽게 했죠.”

하지만 학급 아이들이 양씨 얘기를 듣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미안하다고 말을 건네는 그런 영화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냥 떨떠름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 따돌린 아이들을 왜 미워할 수가 없다고 했던 건가요.

“ ‘그들을 가해자라고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죠. 한편으로는 ‘꼭 악의를 가져야만 가해자인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제가 택한 방식이 또래의 바깥에 있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다른 방식(혐오와 차별의 놀이에 참여)을 택한 거죠.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 후에도 친구들에게 ‘그건 잘못된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어요.”

- 대학입시를 포기했을 때 주변에서 놀라지 않았나요.

“선생님들이 아쉬워하시긴 했어요. 어머니는 우셨고요. 하지만 학교에서 많은 트라우마를 입었는데, 학교의 폭력성에 대해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대학에 가기는 싫었어요. 주변 반응은 다양했는데 어떤 친구의 문자가 특히 기억에 남아요. ‘그 모든 혼란의 끝이 너를 위한 선택이어서 좋다’였어요.”

양씨가 쓴 대학입시거부 선언문의 제목은 ‘거부당한 내가 거부한다’이다. 그는 선언문에서 “학교에서 내게 주어진 자리는 오로지 책상과 의자뿐이었다. 그곳에 앉아서 창문 바깥세상을 염탐하며 죽은 듯 하루를 보냈다”고 했다. “모범생이란 칭찬을 듣는 게 불편해졌다. 내 안의 노예근성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양씨는 “모두가 탈락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꿈꿀 것”이라고 다짐했다. 학교에서 쌓인 고민을 외면하지 않았던 그가 ‘청소년운동’으로 향했던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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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아동권리위원회 위원들에게 한국의 ‘스쿨미투’ 현황을 알리기 위해 현장에서 배포했던 ‘로비문서’를 들고 있는 양지혜씨. 김영민 기자


-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은 어떻게 만들게 된 건가요.

“201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년정치공동체 ‘너머’에서 상근직으로 일했어요. 그해 5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났어요. 추모행사의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여성 청소년들을 많이 만나 대화를 나눴죠. 2017년부터는 ‘이런 얘기를 세상에 더 알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했어요.”

청페모는 2017년 스승의날 ‘이제는 성평등을 배우고 싶다’ 문화제를 열었다. 같은 해 9월엔 가정 내에서 ‘보호’와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폭력의 경험을 나누는 ‘딸들의 페미니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들은 여성 청소년들이 자신의 몸과 욕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문화와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지난해 ‘스쿨미투’가 시작됐다.

- 스쿨미투가 터져 나온 지 1년 정도 됐어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지난해 2월에 스쿨미투 페이스북 페이지를 열고 제보를 받았어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건 지난해 4월 용화여고 사례였던 것 같아요. 졸업생들이 국민신문고에 고발문을 올렸고 재학생들이 창문에 ‘#WITH YOU, #WE CAN DO ANYTHING, #ME TOO’ 포스트잇을 붙이며 지지했죠. 이후 전국의 여러 학교에서 고발이 잇따랐어요.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라온 제보만 해도 130만건이 넘었어요. “너희는 훌륭한 씨를 품을 밭이 될 몸이다, 그러니 좋은 음식 많이 먹어라” “옷을 벗을 거면 공개적으로 벗어 봐라” “내 무릎에 앉으면 수행평가 만점이다”. 교사가 교실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고 해요. 자기 속옷을 손빨래하라고 시키거나 학생 무릎에 누워 귀지를 파달라고 요구하거나 술 마실 때 시중들라고 시킨 사례도 있었어요. 청페모는 고발자와 고발자를 연결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집회를 여는 등의 역할을 맡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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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력·성희롱 가해 교사들은 얼마나 징계를 받았나요.

“이번에 유엔에도 제출했는데, 더불어민주당 김해영 의원실이 정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스쿨미투가 공론화된 65개교 중 27개교에서만 수사가 이뤄졌어요. 또 민주당 박용진 의원실에 따르면 경찰에 신고된 사례에선 (가해교사에 대한) 중징계가 이뤄졌지만 학교에 신고한 경우는 학교가 경징계를 한 후 자체 종결해 버렸어요. 그리고 지난 3년간 ‘성비위’로 해임·파면된 교사 중 15명은 취소청구로 교단에 복귀했고요. 제가 중학생일 때도 남학생들의 불법촬영 사건이 있었어요. 돌이켜보니 학교가 성폭력을 은폐하는 방식을 정확히 보여준 일화였어요. 종례시간에 여학생들만 모아놓고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남선배들이 치마 속을 사진 찍는 일들이 있으니 조심해라, 원래 치마 안에 체육복을 입으면 벌점을 줘야 하는데 안 줄 테니 입어라, 그리고 벽에 붙어 다녀라.’ 그때 불법촬영 사건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학생들은 알 수도 없었죠.”

- 청소년 고발자들을 돕고 지켜보는 경험을 했어요.

“고발자들은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어요. 한 학교에서는 고발자 색출에 나섰고 고발자에게 학교 명예훼손을 이유로 사과문도 요구했어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학생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가해교사가 사과하고 마무리했다고 해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고발자는 소진되는 거죠. ‘교권’이라는 말이 오염돼 있어요. 물론 가해교사의 진술권, 방어권도 중요하겠지만 수백명의 진술보다 더 값어치가 있는 건가요? 학교에서는 교사에게 성폭력을 경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지 않아요. 청소년들은 배우지 않았음에도 스쿨미투로 스스로 나섰어요. 고발자가 위협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보호조치도 필요하고요, 체계적이고 믿을 만한 청소년 성폭력 접수 시스템도 필요해요.”

스쿨미투 고발자들은 지난해 11월3일 청페모 등이 주최한 집회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의 무대에 올라 자신의 경험을 알렸다. 잦은 신체접촉과 성희롱 발언, 벌점 등으로 협박하는 ‘2차 가해’에 대해 얘기했다. 고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얘기도 하고 싶다며 발언을 신청한 이들이 많았다. 혹은 글을 건네주며 읽어달라고 했다. 함께 ‘힘’을 모아가고 있음을 느낀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 스쿨미투 해결을 위해 사립학교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어요.

“사립학교에서는 교원의 징계수위를 재단이 정할 수 있거든요. 국공립 교원은 교육청에서 결정합니다. 처벌수위를 같게 해야 한다고 봐요. 사립학교의 공영이사제도 도입되기를 바랍니다. 학교가 폐쇄적일 때 성폭력이 발생하기 쉬워요. 그리고 수사기관의 미온적 태도도 문제죠. 시기를 놓쳐서 진술하기 힘든 부분도 있고, 실명으로 진술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럴 때 청소년 당사자의 관점에 입각한 수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그게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 용화여고의 가해교사가 불기소됐는데 어떻게 보는지요.

“재학생 160명이 공통적으로 그 교사를 지목했는데도 그렇게 됐어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재학생들은 용기 내서 고발한 만큼 가해교사가 돌아오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 이달 초 유엔 방문은 어땠나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으로부터 제안을 받아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 스쿨미투 보고서를 보냈는데 초청까지 받게 됐어요. 고등학교 3학년인 청소년 당사자, 민변의 장보람 변호사와 함께 갔어요. 스쿨미투로 제보된 사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후속대책 마련 등을 대한민국에 권고해달라고 유엔에 요청했어요. 아동인권 전문가들은 한국 청소년들이 이런 대중적인 운동을 이끌어낸 점이 인상적이라고 하더라고요. 일정을 마치고 나니, 청소년들의 탈코르셋 운동, 스쿨미투 운동이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다는 걸 더 확실히 느낄 수 있었고요. 청페모가 이들의 ‘허브’로서의 역할을 계속 해야겠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지난 4~9일 진행된 사전심의 2~3주 후 이슈리스트를 발표한다. 이 리스트에 스쿨미투가 상정되면 유엔 본심의에서 다뤄진다. 그러면 유엔이 한국 정부에 학교 성폭력에 대한 적극적 수사 등을 권고할 수 있게 된다.

- 대학에 가지 않고 페미니즘 운동, 스쿨미투 운동으로 4년을 보냈어요. 혹시 후회하지 않나요.

“지금은 후회하지 않지만 어쩌면 나중엔 후회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직접 선택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선택을 못하고 내몰리며 산 사람보다 덜 불행할 거라 생각해요. 내 마음의 소리를 듣고 멈춰선 경험은 저 스스로가 아니면 줄 수 없는 경험이었거든요. 이제 저는 타인의 욕망에 맞춰 스스로를 재지 않게 됐고 저의 각진 턱, 통통한 손목, 든든한 뱃살을 좋아해요. 스무 살 즈음의 여성은 어떠해야 한다는 그러한 규범을 깨 가면서, 저의 성적 욕망도 보듬을 수 있게 됐고요.”

양씨는 인터뷰 중 “성폭력 피해를 아동·청소년기에 경험하는 경우가 40%에 이른다”는 점을 강조했다. 스쿨미투의 해결과 대안마련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유엔 방문보고 차원에서 마련한 16일 집회의 이름은 ‘스쿨미투, 대한민국 정부는 응답하라’다. 이날 유엔에 전달했던 요구안을 청소년들이 직접 청와대에 전달할 계획이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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