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가부장제 짓눌린 일본 그녀들 마음속 ‘시한폭탄’이 터졌다

댓글 3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재일 한국작가가 말한다

‘82년생 김지영’에

일본 여성이 응답한 이유

경향신문

12월 출간 이래 일본에서 6만7000부가 판매되며 한국 소설로선 이례적인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82년생 김지영>이 오는 19일로 예정된 조남주 작가의 방일을 앞두고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김민정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선 ‘맘충’ 일본선 ‘민폐’

육아와 가사에서 느끼는

여성 혐오와 차별 닮은꼴 현실

소득차별·성폭력 공포에도

“나만 느끼는 것 아니구나”

스스로 알게 하고 깨닫게 해


매년 밸런타인데이 일본의 초콜릿 상점은 여성 고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지난해 벨기에 초콜릿회사 고디바가 일명 ‘의리초코’(여성들이 직장 동료 등 남성들에게 사랑의 감정 없이 선물하는 초콜릿) 문화를 폐지하자는 광고를 낸 후 올해는 의리초코를 없애자는 회사가 늘었고,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도 의리초코를 몰아내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여성에게 의리보다 ‘의무’에 가까운 초콜릿 선물 문화를 두고도 공방이 이는 일본에서 한국 소설 한 편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12월 발매된 <82년생 김지영>은 2월 둘째 주 현재 6쇄를 찍고 6만7000부가 판매됐다. 14일에는 오후 내내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서 일본 소설을 제치고 문예(문학) 부문 시간당 판매량 1위를 차지했다(일본 아마존은 시간당 판매량만 공개한다). 오는 19일로 예정된 조남주 작가의 방일을 앞두고 판매량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 소설 불모지 일본에서 <82년생 김지영>의 기적은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경향신문

3년 전부터 한국 책 독서모임 ‘한국문학을 즐기는 모임’을 주최해온 세기 도모요는 시집살이 부분에는 크게 공감하지 못했지만, <82년생 김지영> 전체에 흐르는 (여성이 느끼는)짓눌린 공기는 일본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여성은 아이를 낳지 않아도 비난을 받고, 아이를 낳아도 눈치를 봐야 해요. 아기 낳고 일을 하면 아이가 불쌍하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다고 일을 안 하면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을 읽을수록 점점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반부의 대학 입시, 출산, 결혼에 관한 부분은 자신과 친구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육아와 가사는 일본에서도 오직 여성의 일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어요. 남편에게는 내내 가사가 여성의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같이하도록 시켜야 했어요.” 세기 도모요는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소득이라면, 일상에서 여성으로서 느끼는 위화감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는 것이다. “저도 치한을 만난 적이 있어요. 바바리맨은 일본에서도 흔한 존재입니다. 치한에게 당했을 때, 대부분의 여성들은 혹여 자기 자신이 그런 범죄를 유발하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지요. 그렇지만 우리들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이 책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어요. 그런 일을 당했을 때 화를 내도 된다는 것을요.”

경향신문

한국 소설들이 차츰 알려지면서 지난해 11월 신주쿠의 기노쿠니야 서점은 한국서적 코너를 신설했다. 1927년에 창업해 전국에 점포망을 가진 일본 기노쿠니야 서점이 한국서적 코너를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일교포 단체 직원 서선미씨는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내내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아들을 꼭 낳으라는 노모의 압력, 손주의 성별에 따른 차별 대우 모두 충격적이었습니다. 혼자 육아를 맡으면서도 놀이터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걸로 ‘맘충’이라 불리는 것도요.” 서씨는 맘충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무척 아팠다고 했다. 그런 혐오의 언어가 없을 뿐 일본에서도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은 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전철을 탈 때 유모차를 접지 않고,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타면 따가운 눈초리가 날아들기도 한다. 트위터 검색창에 일본어로 ‘유모차’를 적어 넣으면 가장 먼저 뜨는 자동 완성 단어가 ‘민폐’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전철을 탔다가 남성 승객으로부터 발로 차였다는 증언도 있다. 실제로 2013년에는 유모차를 발로 찬 남자 대학생이 체포된 일도 있었다. 이런 공기 속에서도 서씨는 자신만의 페미니즘 실천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는 아들을 둘 키우는데, 어느 날부터 아이가 빨간색 옷을 입지 않겠다는 거예요. 여자색이라고 말이죠. ‘바바파파’(동화 캐릭터)도 아빠가 분홍, 엄마가 검정이라며 납득을 시켰죠. 성별을 색으로 정할 수는 없다고요. 집에서도 되도록 남녀구별 없이 가사를 하고 말도 조심해서 쓰려고 하고 있어요.”

한국 소설 불모지 일본서

페미니즘 소설 번역 꺼렸지만

미투 운동에 출간, 반향 일으켜

대놓고 꼬집는 자국 소설보다

타국 이야기라 치부하며

공감 얻은 것도 한몫


1971년생 가와무라 유코는 진보적인 가정에서 자랐다고 자부한다. “제가 자랄 당시 딸이 있는 집들은 모두 통금 시간을 정해놓고 있었어요. 오후 6시든 8시든 꼭 부모가 정한 시간에 들어가야 했고, 여자니까 단과대학이나 전문학교에 가야 한다는 부모의 뜻에 따랐죠.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친근하셨고, 주말에는 다 같이 교회에 나갔습니다. 남녀차별을 크게 느끼는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남녀차별을 경험한 것은 결혼을 하면서부터였다. 일본에서는 결혼을 하면 남녀가 성(姓)을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라도 되며, 반대로 아내의 성을 남편이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통계를 보면 아내가 남편의 성으로 바꾼 경우가 96%,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른 경우는 4%에 지나지 않는다. 가와무라 유코도 결혼과 동시에 자신의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랐다. “은행계좌도, 신용카드도 하다못해 병원 진료증이며, 포인트카드까지 이름을 바꿔야 했어요. 귀찮고 불편한 작업이었습니다. 왜 여자에게만 그런 불필요한 절차가 요구되는지 그때 조금 화가 났어요.” 이혼은 일본 사회가 여성에게 살기 좋은 사회가 아니란 것을 강력하게 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성(姓)을 원래대로 되돌려야 했으며 취업도 쉽지 않았다. 비정규직으로 아이를 키우는 일은 가와무라 유코를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극한의 상태로 밀어 넣었다. “아이가 중학생 때 학교폭력을 당했어요. 그래서 직장에서 조퇴를 해야 했는데, 비정규직인 저에게 정규직인 20대 상사는 ‘회사와 가정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고 물었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 대답도 못했어요. 억울하고 화가 났어요. 하지만 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는 가정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못한 것을 끝내 후회하고 있다. 곧장 사표를 쓰고 싶었지만, 아이와의 생계를 생각해야 했다. 결국 그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그는 여전히 당시의 억울함을 떠올린다.

경향신문

<82년생 김지영>의 인기 덕분에 조남주 작가가 참여한 페미니즘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도 일본 출간을 앞두고 있다.


2017년 후생노동성이 조사한 일본 모자가정의 연 수입은 약 230만엔이다. 부자가정의 절반 수준이다. 230만엔은 혼자 살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일본의 한 달 생활비 통계를 보면 2인 이상 가족의 경우 약 31만엔이다(2017년 총무성 가계 조사). 가와무라 유코 주변에는 남편에게 불만이 많지만 생활수준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다며 쉽게 이혼하지 못하는 여성들도 있다. “여성에게 이혼은 궁극의 선택이에요. 남편과 그 가족으로부터 속앓이하는 고통을 택하느냐, 아이를 키우며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하느냐. 어느 쪽을 선택해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가 보기에는 한국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진취적인 사람들로 비친다. 그에 비해 일본 여성들은 힘이 없고 미숙해 보인다고 했다.

소설가이자 배우 이토 세이코는 <82년생 김지영>을 “좋은 베스트셀러가 국가를 움직인 케이스”라고 평가했고, 작가 프레디 미카코는 “페미니즘은 학문이나 사상이 아니라 여성들의 일상 속에 있다. 그것은 살아있고 생활하는 것이란 것을 소설을 통해 파워풀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극찬을 받는 소설이 일본에서 번역되어 나오기까지는 순탄하지 않은 과정을 거쳤다. 일본 출판사들이 처음에는 출간을 꺼렸기 때문이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 등의 일본어판을 펴낸 일본 출판사 쇼분샤의 한국어 서적 담당 편집자 사이토 노리타카는 이미 2년 전 <82년생 김지영>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이 책이 일본에서도 인기를 얻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고 한다. “페미니즘 관련 도서가 일본에선 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붐이 될지는 몰랐습니다. 한국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는 알 것 같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어떨지 감이 오지 않았어요. 다만 일본에서도 미투 운동이 벌어지고 전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으면서 매우 좋은 타이밍에 번역되어 나왔다고 봅니다.” 그는 이 책이 딱히 새로운 사상을 늘어놓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들의 고민이 남성과 얼마나 다른지를 실감했습니다. 아내를 ‘돕겠다’는 단어는 되도록 피하려고 하고 있어요. 조심한다고 하는데도 가끔은 저도 모르게 마치 가사와 육아를 아내 일로 치부하게 될 때가 있지요.” 그는 앞으로도 ‘한국문학이 준 선물’이란 시리즈를 통해 다양한 한국문학을 소개해나갈 생각이다. “젊은 한국 작가들은 과거 작가들과 달리 사회적인 문제들을 무겁지 않게 다루고 있습니다. 일본 소설들이 내부(개인 심리 위주의 사소설)를 향하고 있다면 한국 소설은 외부(사회문제와 부조리)를 향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재밌는 한국 소설을 번역해서 더 많이 알리고 싶습니다.” 그는 또한 박완서, 오정희 등 한국 기성작가들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일본에 소개하고 싶다고 한다. 한국 소설들이 점차 알려지면서 지난해 11월 신주쿠의 기노쿠니야 서점은 아예 1층에 한국서적 코너를 신설, 교보문고와 제휴해 다양한 한국 서적을 판매 중이다.

일본 소설가 후카자와 우시오도 <82년생 김지영>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말한다. “일단 재미있었어요. 지나치게 난해한 작품도 아니었고, 카운슬러를 화자로 등장시킨 것도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는 최근 일본 소설들이 오락적인 면에 치우쳐 미스터리가 각광을 받고 있는 반면, 한국 작품들은 여전히 정의와 사회구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봤다.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도 재미있게 글을 쓰는 작가들이 늘어나는 것이 한국 소설에 대한 흥미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나오기 힘든 작품들이라는 분석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일본인들이 평소 생각했던 것들을 작품으로 완성시켰어요. 만일 일본 작가가 이런 소설을 쓰겠다고 한다면 편집자들이 반갑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여성의 삶과 페미니즘 관련 작품들이 큰 반향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조남주 작가 일본서 북콘서트

티켓 매진·유료 라이브 관람…

일본 독자들 시선 집중


일본도 여전히 가부장제가 강력한 사회이다. 문학계 관계자들은 이런 사회 분위기로 인해 일본의 약점으로 대놓고 꼬집는 자국의 소설보다는, 타국의 이야기로 쓰인 <82년생 김지영>에 더 편하게 공감할 수 있었을 거라고 입을 모은다. <82년생 김지영>의 여파는 일본 여성들이 안고 있는 서러움을 인지하게 했고 때로는 화를 내도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했다. 일본 남성들에게는 여성의 현실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계에서는 한국문학의 입지를 강건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덕분에 조남주 작가가 참여한, ‘페미니즘 소설’이란 단서가 붙은 <현남 오빠에게>도 20일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 책의 편집자인 하쿠스이샤 출판사의 스기모토 기미요는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며 “<현남 오빠에게>를 통해 다양한 사례의 페미니즘을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쿠스이샤는 앞으로 한강과 정해영의 단편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82년생 김지영>으로 일본에서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조남주 작가의 북콘서트가 오는 19일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열린다. 아쿠타가와상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와 함께하는 대담도 열릴 예정인데, 유료임에도 티켓은 벌써 동이 났고 쇄도하는 독자들의 문의로 인해 유료 라이브 관람 행사까지 열린다고 한다. 조남주 작가의 첫마디에 일본 독자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필자 김민정

경향신문



김민정은 1990년대에 일본으로 이주한 후 일본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겨울연가 뮤지컬> <줄리엣의 남자> 등의 편집을 맡았고, 한국 드라마 자막 감수 등을 담당했다. 저서로 <엄마의 도쿄> <소설 도쿄>, 번역서에 <오키나와에서 헌책방을 열었습니다> <시부야 구석의 채식식당> 등이 있다.


김민정 재일작가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