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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커버스토리]노동자 권리는 없고 ‘백의의 천사’ 헌신만…이젠 병원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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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태움을 만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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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18명 돌보는 살인적 업무강도

휴일·초과수당 규정 맞게 챙겨주는 국내 병원 드물어


한국의 병원은 바쁘다.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 부족하다. 지방병원은 열악한 근무여건에 인력 구하기가 힘들다. 서울 주요 병원은 중증 환자가 몰리는 고된 환경 속에 인력들이 떠난다. 높은 노동 강도에 예민해진 병원 노동자는 위계질서 속에 손쉽게 하급자를 할퀸다. 신입 간호사는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환자를 간호하며 실수를 연발하고, 쏟아지는 질책에 이내 자존감을 잃는다. 본인 업무와 신입 간호사 교육을 병행해야 하는 경력 간호사에게 쏟아지는 압박감은 교육과 ‘태움(직장 내 괴롭힘)’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한 5년차 경력 간호사는 “지난해 박선욱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간호사들의 공통적 분위기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알겠다는 거였다”며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이 왜 죽었는지 알겠다고 하는 건 너무 이상한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지역과 병원 규모를 막론하고 태움은 존재한다.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가 상처받고, 모두가 일터를 떠나는 비극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 부족한 간호인력이 근본원인

하모씨(26)는 서울 소재 대학병원에서 3년 이상 근무하다 그만뒀다. 병동 간호사였던 하씨는 혼자 16~18명의 환자를 봤다. 환자를 본다는 것은 크게 ‘액팅’과 ‘차팅’으로 나뉜다. 액팅에는 대화를 통해 환자 상태를 파악하고 약 등을 투여하는 행위가 포함된다. 차팅은 환자의 특이사항이나 투여한 약물 등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이 반복되는 업무를 18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변수가 발생하면 손이 더 간다. 환자의 상태에 변화가 있을 땐 의사에게 ‘노티(notify·알리다)하고, 간단한 약처방은 간호사가 알아서 해야 한다. 의사도 바쁘기 때문에 매번 처방을 구하면 돌아오는 건 호통뿐이다. 환자나 보호자의 요구도 중대 변수다. 간호사 김모씨(27)는 “5분에 한 번씩 체온을 재달라고 하거나, 조금만 뭐가 묻어도 병상 시트를 갈아달라는 요청을 중간중간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늘 유동적인 입·퇴원 현황은 간호사의 업무량을 크게 좌우한다. 신규 입원 환자일 경우 어떤 약을 왜 먹는지, 가족력은 있는지 등 기초 정보를 꼼꼼히 파악해야 한다. 환자가 늘 가만히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은 아니기에 반복적으로 투약량과 상태를 체크해야 하는 것도 간호사의 몫이다.

하씨는 “입원 환자가 많은 날을 ‘환타’라고 하는데, 환자한테 탄다는 뜻”이라며 “몸을 반으로 갈라서 한 발로는 저기 가 있고, 한 발로는 처치실 가 있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하씨는 입사 후 체중이 10㎏ 줄었다. 입사 첫 3개월간은 하혈이 있었고, 현재는 갑상선 기능 저하증 치료제를 복용하고 있다.

환자의 병세가 나쁘면 간호사 1인이 맡아야 할 환자의 수도 줄어든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한국 병원의 업무강도는 살인적이다. 지난 4년간 병원 6곳을 거친 간호사 김모씨(27)는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4명까지 보게 되자 사표를 냈다. 인공호흡기 등 환자에게 달아야 할 기계가 많고, 약도 많아 손이 많이 가는 중환자실은 간호사 1인당 환자 수가 일반 병동보다 크게 적다. 김씨는 “중환자실에서 일하면 내가 조금만 실수해도 (환자 상태를 나타내는) 그래프가 요동을 치니까 환자가 엄청 크게 다가온다”며 “환자를 3명까지 보다가 4명을 보니까 하루 종일 분주하게 움직여도 밥도 못 먹고 정시 출퇴근도 절대 못했다”고 했다.

중환자실 간호사 담당 환자수 평균 4명 ‘미국의 2배’

병원 병상 수는 OECD 2위로 많아

인력난 속에서도 면허 소지자 ‘절반 이상’ 복귀 꺼려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일본 보건성은 중환자실 간호사 1인이 맡는 환자 수가 2명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지난해 자료를 보면 한국의 중환자실 간호사는 평균 4명의 환자를 담당하고 있다.

한국 병원의 열악한 근무여건은 수치로도 입증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8 보건통계’를 보면 2016년 기준 한국의 인구 1000명당 활동 간호사 수는 6.8명이다. 통계가 작성된 25개국 중 16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반면 입원진료 병원 병상 수로는 한국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한국의 인구 1000명당 병상 수는 12.0개로 일본(13.1개)에 이은 2위였다. 환자는 많은데 간호사는 부족한 것이다.

결국 간호사는 떠난다. 지난해 발간된 보건복지통계연보를 보면 2017년 기준 간호사 면허 소지자는 37만4990명이다. 하지만 병원급 이상에 종사하는 간호사는 16만4000여명에 그치고, 의원급 및 조산원을 합쳐도 18만여명 수준이다. 면허 소지자의 절반 이상이 병원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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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움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서울 소재 공공의료기관에서 근무한 간호사 박모씨(28)의 입사 후 수습기간은 2개월이었다. 3개월째부터 현장에 투입됐지만 할 일을 빠뜨리는 실수가 이어졌다. 박씨는 “선배들이 ‘원래 수습기간 6주 주는데, 2주나 더 줬는데도 왜 못하느냐’고 했다”며 “사람 몸을 다루는데 2개월 교육하고 3~5년차처럼 일하길 바라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병원의 환경은 신입 간호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신규 간호사의 수습기간은 길어야 2개월, 짧으면 2주 만에 끝난다. 교육 여력이 없는 병원은 선배 간호사들에게 교육 부담을 전가한다. 가뜩이나 과도한 업무량에 시달리는 선배 간호사들은 신입 교육이라는 추가 업무까지 떠안아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태움이 시작된다.

일손이 부족한 현장에선 신입 간호사도 수습기간이 끝나면 바로 실전에 투입돼 한 명의 간호사 몫을 해내길 요구받는다. ‘신규’ 딱지를 벗어나기 전까지 실수에 대한 선배들의 지적이 잇따르고 이는 쉽게 태움으로 변질된다. 지방 공공의료기관에 다녔던 4년차 간호사 강모씨(26)는 병동의 만년 막내였다. 강씨와 함께 입사한 3명 중 1명이라도 실수를 하면 선배 간호사는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실수를 공유했다.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취지였지만 ‘실수담’ 공유는 밤 12시건, 새벽 4시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이뤄졌다.

신입 간호사는 더 빨리 병원을 떠난다. 병원간호사회의 2016년 자료를 보면 신입 간호사의 1년 내 이직률은 33.9%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평균 이직률에 비해 8배가량 높은 수치다. 병원은 떠난 신입 간호사만큼 새로운 신입을 충원한다. 그리고 태움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태움의 가해자로 지목되는 경력 간호사들 역시 피해를 보는 건 마찬가지다. 5년차 간호사 최모씨(30)는 “나도 간신히 일하고 있는데 신입을 가르치라고 하면 너무 공포스럽다”며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 없고 개인에게 맡기는 것이 교육의 질을 장담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한국간호행정학회지에 실린 ‘직장 내 괴롭힘이 간호서비스 질에 미치는 영향’ 논문을 보면 총 임상경력 3~5년인 간호사가 가장 많은 업무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논문에서는 “경력 간호사들에게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기본적인 간호업무 외에도 신규 간호사의 업무 적응을 돕는 교육업무 등 부담이 가중되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분석했다.

신규 간호사 업무 적응 적정기간은 8~12개월

레지던트 프로그램 도입한 미국, 이직률 현저히 줄어


태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2016년 발표된 논문 ‘다수준 생존분석을 이용한 신규 간호사 이직 영향요인’에선 신규 간호사의 업무 능력 향상과 업무 적응을 위한 적정기간을 8~12개월로 산출했다. 미국은 1999년부터 716시간의 임상경험과 225시간의 트레이닝 실습으로 구성된 1년 과정의 ‘간호사 레지던트’ 프로그램을 도입했는데, 이후 신규 간호사의 이직률은 현저히 줄었다.

지난 1일 출범한 보건복지부 ‘간호정책 태스크포스(TF)’는 1분기 내에 77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신입 간호사 교육·관리 업무만 전담할 간호사 259명을 일선 병원에 배치하기로 했다. 규모는 작더라도 문제 해결을 위한 첫발은 내딛는 셈이다.

■ 노동 인권 외면하는 병원들

사람은 적고 일은 많은 병원이 현 체제를 유지하는 원동력은 강력한 병원 내 위계질서와 생명을 다룬다는 사명감이다. 이런 환경에서 간호사는 환자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백의의 천사’로 존재할 뿐, 한 명의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간호사 김씨는 지난 설 연휴 기간 중 단 하루 쉬었다. 3교대로 24시간 돌아가는 병원 근무에서 그는 2월4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매번 ‘이브닝(오후 3시 출근~오후 11시 퇴근)’ 근무를 했다. 그러고도 8~9일에는 ‘나이트(오후 11시 출근~오전 7시 퇴근)’ 근무에 투입됐다. 2월 둘째 주 김씨의 근무시간은 명목상으론 48시간이다. 하지만 인정되지 못한 근무시간은 더 있다. 간호사들은 통상 근무 전후로 인수인계가 필수적이다. 환자 상태와 수술·투약 여부 등을 파악하지 않으면 업무를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간호사들은 정해진 근무시간보다 최소 30분은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한다.

김씨는 “이브닝 근무가 오후 11시에 끝나도 인계하고 차트 정리 등 남은 일을 하면 12시가 넘을 때가 많고, 최장 새벽 5시에 퇴근한 적도 있다”며 “이 시간을 초과근무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한 지가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병원은 묵묵부답”이라고 했다. 초과근무를 인정해주는 병원에서도 근무시간 인정을 요청하기엔 눈치가 보인다. 간호사 하모씨는 초과근무 인정을 요구했다가 상급자로부터 “돈 벌 생각으로 초과근무하는 건 아니지 않으냐”는 핀잔만 들었다. 휴일 근무도 잦지만 휴일근로수당을 챙겨주는 병원은 드물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 상황에서 연차를 쓰는 건 그림의 떡이다. 서울 대형병원에 근무하는 5년차 간호사 정모씨(28)는 인플루엔자에 걸린 동료가 인력 상황으로 인해 병가도 내지 못하는 것을 봤다. 해당 동료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로 고열에 시달렸다. 유행병 감염 우려가 있음에도 병원은 병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정씨는 “윗사람에게 병가 안 주냐고 물어봤는데 ‘증상이 없으면 괜찮다’는 답만 돌아왔다”고 했다.

간호사 강씨의 경우 병가를 쓴 것이 결국엔 퇴사로까지 이어졌다. 골절상으로 입원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강씨는 병가를 고민했다. 병가를 들어가기 전에는 같은 병동에서 근무하는 10여명의 간호사에게 일일이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선배들은 “너 일하기 싫어서 병가 썼느냐” “얼마 전에 놀러도 간 애가 왜 갑자기 아프냐”며 몰아세웠다. 복귀 후에도 강씨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결국 강씨는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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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간호사들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간호사를 언제든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보는 병원, 간호사의 노동권과 건강권·인격권은 신경 쓰지 않는 정책, 간호사를 깔보는 환자·보호자와 의사 등이 이들의 죽음에 모두 책임이 있다. 간호사를 전문 의료인으로 존중하지 않는 환경에서 간호사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헌신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간호사들은 스스로를 ‘태우면 타는 장작’에 비유하곤 한다. 이들은 “사람을 연료로 태우지 말라”를 외치기 위해 거리로 나올 예정이다. 16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간호사들은 박선욱 간호사 1주기에 맞춰 ‘더 이상 간호사를 죽이지 말라’ 집회를 연다. 집회는 올해 초 숨진 서지윤 간호사를 추모하는 의미도 있다. 박선욱 간호사 사망사건 진상규명과 산재인정 및 재발방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서지윤 간호사 사망사건 시민대책위원회가 주최한다. 설 연휴기간 발생한 가천대 길병원 전공의 사망건을 계기로 의사단체인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 인권국도 집회에 참여한다. 한 간호사는 “얼마나 더 많은 간호사가 죽어야 바뀔까. 간호사가 처한 환경을 고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효상·김서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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