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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IF] "가짜 공포로 실제 위협 대처"… 뇌는 좀비 영화에 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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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영화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TV에서 귀신 들린 사람들과 퇴마사의 얘기가 인기를 끌더니 이제는 영화 속 조선시대에도 좀비들이 떼로 몰려들고 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다가도 영화가 끝나면 코미디를 본 것처럼 웃으며 나온다. 왜 사람들은 공포물을 그토록 즐기는 것일까.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경험한 진짜 공포도 그렇게 극복할 수는 없을까.

◇가짜 공포로 실제 위협에 대비

공포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덴마크 오르후스대의 매티아스 클라센 교수 연구진은 지난해 말 국제 학술지 '진화 행동 과학'에 발표한 논문에서 "공포물 애호가 1000명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개방적이고 지적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사람들이 공포물을 즐기는 것은 스스로 공포에 대한 지배력을 갖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야생동물들이 새끼 시절 서로 물고 뜯는 놀이를 통해 사냥 능력을 익히듯, 안전한 장소에서 공포를 체험해 실제로 닥칠지 모르는 위협에 대한 대처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클라센 교수는 어린 시절 숨바꼭질 놀이 역시 천적으로부터 피하는 능력을 키우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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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뇌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스위스 제네바대의 람프로스 페로감브로스 교수 연구진은 지난달 악몽을 꾸는 사람들의 뇌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 89명에게 1주일간 꿈을 일기로 기록하도록 했다. 연구진이 공포감을 유발하는 사진을 보여줬을 때 악몽을 자주 꾼 사람들은 뇌에서 공포와 연관된 활동이 덜 나타났다. 반대로 학습 영역은 활발하게 작동했다. 연구진은 "악몽 경험을 토대로 사진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감정과 이성 영역의 상호작용

뇌에서 공포를 담당하는 곳은 귀 바로 위쪽의 뇌에 있는 편도체이다. 아몬드 모양의 이 영역에서는 감정과 관련된 자극을 처리한다. 누군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바로 편도체가 작동한다. 공포에 질린 사람을 보면 편도체의 활동이 급증한다.

편도체가 요동치면 인체는 위험에 대처할 준비를 한다. 동공과 기도가 확장되고 호흡도 빨라진다. 스트레스 호르몬도 분비돼 온몸을 긴장시킨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혈압도 높아진다. 이로 인해 혈관에 흐르는 혈액량이 증가해 근육에 당분 공급이 급증한다. 반면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은 소화기관은 활동이 느려진다.

편도체가 흥분해서 조기경보 신호를 낸다면 바로 옆에 있는 해마는 냉정한 전투 지휘소 역할을 한다. 해마는 기억과 학습 중추이다. 전전두엽 피질과 함께 편도가 감지한 위협 요인을 평가한다. 예를 들어 야생에서 사자를 보면 공포 반응에 이어 바로 근육을 작동시켜 도망가게 하지만, 동물원에서는 웃으며 즐기도록 한다.

◇공포 기억 없애는 방법도 개발

좀비 영화나 유령의 집은 가짜 공포를 경험하게 해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만 실제 사고나 범죄로 공포를 경험하고 나면 신체에 심각한 피해를 준다. 사고를 당한 장소에 가면 과거 공포 기억이 떠올라 온몸이 얼어붙고 통증이 온다. 이들에게 가장 좋은 치료는 공포와 관련된 기억을 빨리 잊는 것이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 신희섭 단장은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정재승 교수와 함께 '네이처' 14일 자에 "빛을 이용해 공포 반응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음을 쥐 실험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쥐에게 전기 자극과 함께 소리 자극도 줬다. 쥐는 나중에 소리만 들어도 온몸이 얼어붙는 공포 반응을 보였다. 연구진은 이때 좌우로 움직이는 빛 자극을 주면 공포 반응이 신속하게 감소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원래 환자에게 하던 심리치료법을 동물실험으로 재현한 것이다. 연구진은 "편도체로 이어지는 공포 기억 억제 신경회로도 확인했다"며 "앞으로 이 회로를 조절하는 약물이나 기술을 개발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치료하는 데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KAIST 생명과학과 김세윤 교수는 지난달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공포 기억을 없애는 데 관여하는 핵심 효소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포도당과 유사한 당분인 이노시톨의 대사에 관여하는 효소를 차단하자 쥐의 공포 기억이 훨씬 빨리 사라졌다고 밝혔다. 이때 편도체에서는 공포 기억을 없애는 신호전달계가 활발하게 작동했다. 가짜 공포는 즐기고 진짜 공포는 빨리 잊게 해줄 뇌 속의 지우개가 탄생할 날도 멀지 않았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y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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