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나의 일, 나의 길 | 이상국 ‘영진관광문화협동조합’ 이사장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산꼭대기 밟는 등산화는 평지가 그립지 않다
한국일보

이상국 이사장은 "팔공산 왕건길을 알리고 오르는 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어 즐겁다"고 말했다. 김윤곤기자 seoum@hankookilbo.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는 차 트렁크에 늘 등산화를 싣고 다닌다. 뒤축을 한 번 갈았는데 또 갈 때가 돼 간다. 같이 다닌 지가 10년이 다 돼 가다 보니 등산화가 주인을 그대로 닮았다. 평지보다고지에 더 알맞게 길이 났다. 앞만 보고 오르고 또 오르는 게 체질이다. 내려올 때 이것 저것 다 살펴보지만 한눈은 팔지 않는다.

그는 차 트렁크에 늘 등산화를 싣고 다닌다. 뒤축을 한 번 갈았는데 또 갈 때가 돼 간다. 같이 다닌 지가 10년이 다 돼 가다 보니 등산화가 주인을 그대로 닮았다. 평지보다고지에 더 알맞게 길이 났다. 앞만 보고 오르고 또 오르는 게 체질이다. 내려올 때 이것 저것 다 살펴보지만 한눈은 팔지 않는다.

2012년 초였다. 잘 알고 지내는 고향 선배 채희복 ‘돌사장’이 전화를 했다. 칼국수나 한 그릇 하자며 두류공원 잘 가는 식당으로 나오라고 했다. 팔공산 올라가는 길에 선배가 펼쳐놓은 엄청난 돌들을 보면, 우리나라 돌이 다 선배 거냐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할 정도였다. ‘돌사장’이란 별명은 그래서 붙었다. 선배는 난데없이 등산화 한 켤레를 들고 나왔다.

▶“이거 신고 팔공산 등산하자, 운동할 기 많어”

“이 실장, 인자 도청 출근 안 해도 되재? 이거 신고 나하고 팔공산 등산하면서 운동이나 하자. 평생 해도 될 만침 운동할 기 많어.” 경북도 종무실장을 끝으로 38년 공직에서 막 정년퇴임한 그에게 선배는 등산화로 축하와 위로를 하면서 사실은 그의 ‘제2의 인생’을 점지한 셈이었다. 선배가 말한 운동은 단순히 등산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없던 길, 팔공산에 왕건길을 새로 내는 일이었다. 등산로 몇 줄기를 개척하는 일만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 지도를 새로 그리는 일이기도 했다.

퇴임 후 시민을 대상으로 문화 강좌를 열고 있던 이상국(67) 당시 대구한의대 평생교육원 교수(현 영진관광문화협동조합 이사장)의 ‘인생 2막’은 그렇게 시작했다. 제2의 인생 무대는 팔공산. 그 등산화를 신고 팔공산을 오른 지는 이제 9년이지만, 그와 팔공산의 인연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2002년 사무관 승진과 함께 경주시 중부동장으로 부임했다. 중부동에는 서봉총 등 왕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무명총이 많았다. 또 조선왕조사는 책과 드라마로 자주 다뤄지는데 신라사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이 두 가지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신라 왕릉을 전수 조사했다. 그 결과 신라 왕조별 개요, 왕의 업적과 생애, 관련 설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 『한눈에 알 수 있는 신라왕조 992년』을 출간했다. 국내 최초의 단행본 왕조별 신라사였다. 이때의 연구를 통해 그는 신라오악이었던 팔공산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더구나 팔공산은 달구벌의 진산(鎭山)이다.

팔공산은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넉넉한 명당 터전을 아우르며 우뚝하다. 오늘도 사방 수백 리를 굽어보는 으뜸산이다. 신라오악 그 이전부터도 종교의 귀의처로, 심신의 양생처로 삶을 의지해왔지만 세상은 아직 팔공산에 부칠 합당한 헌사도, 구석구석 스민 서사도 두루 밝혀 알지 못한다. 고려 역사 또는 고려 역사 의식에 무관심한 현실 속에서 팔공산 왕건길은 천년의 시공을 건너 천년의 서사를 더듬어 오르는 첫 걸음이었다. 산을 오르는 일이 천년 역사를 더듬어 오르는 길이라면 그 길은 누구나 오르고 싶은 매혹적인 역사 탐방 명소일 것이다.
한국일보

이상국 영진관광문화협동조합 이사장의 등산화. 김윤곤기자 seoum@hankookilbo.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역사 다큐멘터리’ 왕건길을 완성하는 일

“많이 알려진 대로 돌사장 채 선배와 김병수 당시 동구청 팀장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두 분 말고도 여러분의 역할이 큰 힘이 됐지요. 저는 따라다니면서 얘기나 좀 보탠 정도지요.” 오솔길은커녕 넝쿨과 나무 우거져 꽉 막힌 숲을 톱과 같은 손도구로 헤쳐 길을 내는 일은 더디고 힘들었다. 그의 역할은 이런 하드웨어 작업이 끝난 뒤 새 길 곳곳에 숨어 있는 역사적 장소나 유물 유적에 얽힌 역사를 고증하고 서사를 풍부하게 하는 일. 소프트웨어 작업이었다.

‘얘기나 좀 보탰다’고 겸사를 했지만 그가 한 일은 왕건길의 역사성과 서사적 충실성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아직 일반에 공개하기 전인 왕건길 35km 전 구간을 사흘 동안 샅샅이 훑었다. 그는 역사적 사실과 자료에 바탕해서 한 편의 ‘역사 다큐멘터리’ 왕건길을 완성해야 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왕건이 퇴각하면서 볼일을 보고 잠시 쉬어갔다는 통시바위 얘기가 전해져 오기는 하는데, 막상 길을 내놓고 나니 어느 곳 어느 바위인지 특정하기가 어려운 거죠. 또 신숭겸 장군 발바닥에 있었다는 북두칠성 점이 찍힌 ‘발바닥 바위’를 특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전문가가 나서서 전체적인 사실에 맞게 세부적 상상과 맥락을 조율해줘야 하는 거죠.”

“흔히 왕건이 동수전투에서 견훤에 크게 패해 퇴각할 때 금호강 길을 따라 갔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동안 저는 ‘달아나는 장수가 적에게 쉽게 노출될 뿐만 아니라 협공 당하거나 퇴로를 차단당하기 쉬운 강변길로 갔다는 것은 넌센스’라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배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왕건은 산길을 따라 자신을 숨기며 이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왕이 올라갔다는 왕산-백안삼거리-초례봉 길이죠.”
한국일보

이상국 이사장이 팔공산 답사팀에게 왕건 유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왕건은 강이 아닌 산길로 피신했을 것”

등산길(트레킹코스) 왕건길은 왕건이 산길을 이용해 이동(퇴각)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산길 이동설’을 주장해온 그에게 왕건길에 대한 역사적 고증과 맥락 구성을 의뢰한 것은 적절해 보인다.

“해안(解顔)이라는 지명도 그렇습니다. 금호강을 따라 피신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왕건이 숨을 고르자 얼굴빛이 풀렸다(돌아왔다)는 지명 유래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큽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해안은 757년 신라 경덕왕 때 이미 지금 이름으로 개명했습니다. 927년 왕건이 금호강으로 도피하는 과정에서 동네 이름이 생겨났다는 것은 시간상으로 맞지 않습니다. 왕건은 산길을 통해 피신했다고 봐야 합니다.”

“등산로를 따라가기만 하거나 왕건 얘기만 계속 듣는 등산로는 단조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코스 중간 중간에서 파계사, 부인사, 동화사 등을 조망하면서 전통사찰의 역사와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박사 과정에서 불교미술사를 전공하고 경북도 종무실장으로 일한 덕분에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었어요. 2012년 개장과 함께 많은 등산객이 몰렸는데 ‘흥미진진해서 몰입도 높은 해설을 들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국일보

팔공산 답사팀과 왕건길 통시바위 앞에서 기념촬영.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영특한 아이는 역사공부를 좋아한다

그는 1975년 고향인 상주 모서면에서 9급 행정직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그는 영특한 데가 있었다.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을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다. 기억력 좋은 아이가 흔히 그렇듯이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수많은 인명과 고유명사, 연대표를 줄줄이 외웠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었을 겁니다. 고추밭에 일 나가는 어머니를 도우러 따라 나섰습니다. 어머니는 고추 따는 손이 얼마나 빠른지 순식간에 저만치 앞서갔어요. 아무리 해도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그때 어린 마음에도 깨달았죠. 나는 일을 해서는 밥도 못 먹고 살겠구나. 일머리가 없으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구나 했죠. 국어책도 수학책도 통째 외워버렸죠.”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는 친구 100여 명의 전화번호를 기억한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누구에게 전화하려다 전화번호를 모르면 114 전화하듯 그에게 물어본다.

“역사책을 보다 보면, 이순신 장군도 성웅으로 추앙 받지만 한 편으로는 장수가 갑옷도 입지 않고 전장에 나갔기 때문에 군율로 다스린다면 중벌을 면할 수 없었을 겁니다. 같은 이순신 장군이 어떨 때는 영웅이었다가 어떨 때는 중죄인이 되는 게 서글프기도 하고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 이유를 알고 싶었죠. 어린 마음에도 역사에서 진실이란 게 무엇인지 참 궁금했습니다.”

영특한 아이는 안타깝게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 대신 공무원 시험을 봐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대학을 3군데나 졸업했다. 석사에 박사 과정까지 마쳤다. 모두 야간과정이었다. 그는 공무원 생활의 대부분을 낮에는 공무원, 밤에는 학생으로 살았다.
한국일보

사무실을 찾은 손님들. 왼쪽부터 최경학 영진관광문화협동조합 사무국장, 강성호 전 대구미래대학장, 김재옥 7·3회원. 김윤곤기자 seoum@hankookilbo.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33세 최연소로 청백리…이후 삶의 지표

“그러다 보니 정년을 앞둔 잠깐을 제외하고는 평생 휴가를 간 적이 없어요. 주말에 어디로 느긋하게 여행을 다녀본 적도에게 없습니다.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또 감사하지요.” 다들 바쁘게 사는 세상이지만 요즘 세상에 이렇게 살아왔다니.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지가 궁금했다.

“어릴 때부터 궁금한 게 있으면 꼭 그걸 해결해야 했어요. 안 그러면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게 평생 몸에 밴 생활 습관이 됐나 봅니다.” 가난하고 영특한 아이는 본능적으로 깨닫지 않았을까. 가난하고 영특한 아이가 살아남는 길은 오직 공부하는 것뿐이라고. 이후 그의 삶은 지독한 노력파, 학구파의 모범 사례를 보는 것 같다.

1984년까지 10년간 상주군에서 근무한 그는 이듬해 경북도 8·9급 분야 공무원소양고사에서 큰 점수 차로 1위를 차지했다. 소양고사 1위는 공무원 중에도 특별한 공부벌레여야만 할 수 있다.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에 억척스레 직장과 공부를 병행했습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모두 야간 과정을 다닐 수밖에 없었죠.” 그는 영남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행정학 석사)했고, 경주대 문화재과 박사 과정(불교미술사 전공)을 수료했다. 그는 앞서 방송대학 2개 학과를 동시에 다녔다. 이 역시 모두 야간 과정.

“모든 휴가는 출석 수업을 채우기 위해 모아뒀다가 다 썼어요. 웬만하면 넘어갔는데 방송대학 2개 학과를 동시에 다니는 건 좀 힘들더라고요. 2개 학과를 졸업하는 데 꼬박 10년 걸렸습니다. 나도 힘들었지만 10년 동안 휴가 한 번 못 간 가족들에게 또 미안해지네요.(웃음)”
한국일보

7·3회원 30여 명은 지난해 11월 광주시장 초청으로 광주호를 방문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퇴임 후에도 바쁜 삶…활기와 절제의 힘

이제 그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장면. 1983년 당시 내무부와 중앙일보가 공동 주관한 청백봉사상을 수상한 것. 33세로 역대 최연소 청백리였다. 그로서도 가장 영광된 기억이면서 이후 평생 그 자신을 근신하고 경계하게 한 좋은 의미의 굴레가 됐던 일이다. 퇴임할 때까지 그는 청백리였다. 그는 지금 지산동 크지 않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가 정년퇴임할 때 퇴임식장에서 사회자가 낭독한 A4 용지 두 장의 공적 조서는 간략한 주요 공적만으로 빼곡하다. 그 많은 내용을 옮겨 적을 수가 없다. 퇴임 후에도 그는 여전히 부지런하고 바쁘게 산다. 2001년 100여 명이 모여 만든 문화유적답사모임 ‘7·3회’를 이끌며 그동안 150여 회 답사를 했다. 또 답사와 여행의 기쁨으로 행복한 노후를 채우기 위해 영진관광문화협동조합을 설립했다.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데 두 모임 회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회원들에게 그는 ‘인격과 실력을 다 갖춘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최고의 칭찬으로 들렸다. 19년 동안 7·3회를 이끌어오면서 단 한 번도 서로 다투거나 불미스러운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마침 사무실에 들른 강성호 전 대구미래대학장은 이상국 이사장을 주역의 ‘풍화가인’(風火家人, 가정과 사회를 바로잡는 지혜) 괘로 비유하며 ‘언유물행유항’(言有物行有恒, 말에는 실속이 있고 행동은 한결같음)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우리 협동조합에서 열고 있는 고전 강좌는 매번 만원사례입니다. 변함없이 매주 화·금요일 오전 10시에는 회원들과 함께 팔공산을 오르고 있고요. 조선시대에는 집필을 세 권 해야 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책 세 권을 냈으니 이제 호는 받을 수 있을는지요.” 활기와 절제가 한 켤레를 이룬 그의 등산화는 높이 오를 산이 더 많을 것이다.

김윤곤 기자 seoum@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