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3·1 만세운동 아들 기록 노모의 '내방가사'가 사라졌다(종합)

댓글 3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김해 장유 무계만세운동 주동 김승태 어머니 기록…김해시에 기증 후 '행불'

이홍숙 교수 "유례없는 희귀자료", 유족 "이해 못 해"…김해시 "모두 뒤졌는데 없다"

연합뉴스

내방가사로 쓴 '만세운동가'
(김해=연합뉴스) 정학구 기자 = 1919년 김해 장유에서 3천명이 넘는 주민들이 궐기해 '전쟁'을 방불케 했던 만세운동과 이후 재판 과정 등을 '내방가사' 형태로 기록한 자료의 존재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사진은 유족이 촬영해둔 내방가사 일부. 2019.2.12 [김융일 씨 제공] b940512@yna.co.kr



(김해=연합뉴스) 정학구 기자 = 1919년 김해 장유에서 3천명이 넘는 주민들이 궐기해 '전쟁'을 방불케 했던 만세운동과 이후 재판 과정 등을 '내방가사' 형태로 기록한 자료의 존재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김승태 만세운동가'란 제목으로 추정되는 이 자료는 당시 김해 장유 만세운동 주동자 김승태의 어머니 조순남 여사가 취재기자 보다 더 생생하게 내방가사란 문학 장르를 빌어 기록한 것이어서 일제 강점하 독립운동 사료로서나 특이한 형식과 내용의 문학 자료로서도 가치가 엄청날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유족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보관해 온 자료의 중요성을 고려해 2005년 3·1운동 기념식장에서 김해시에 기증했는데 14년이 지난 현재 자료의 행방이 묘연해 유족들이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

◇ 장유 만세운동과 '김승태 만세운동가'

이홍숙 창원대 외래교수는 오는 13일 김해시청에서 열리는 김해 3·1운동 100주년 학술회에서 '장유의 만세운동'과 조순남의 '김승태 만세운동가 관계 고찰'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한다.

이 교수는 사전 배포된 발표문에서 장유 만세운동을 소개하고 당시 주동자로서 일제에 검거돼 고초를 겪고 재판에 넘겨졌던 김승태 관련 내용을 내방가사로 남긴 어머니 조순남 여사를 여성독립운동가로 함께 소개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김해 만세운동은 3월 30일 김해면에서 배동석이 주축이 돼 먼저 일어났다. 이어 3월 31일부터 진영군 하계면 진영리, 김해면, 진영리, 명지면 중리와 진목리에서 연달아 일어났다

장유면 만세운동은 4월 12일에 일어났다. 유하리 김종훤과 외덕 김승태가 주축이 됐다.

김종훤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교육기관을 설립, 민족교육과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김승태는 정통 유학자로서 학문에 정진하는 인물이었다.

연합뉴스

김승태 지사 초상화
[김융일 씨 제공]



12일 당일 이강석이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모으고 김승태가 태극기를 들고 앞장서서 50여명이 무계리로 향했다. 이윽고 무계장터로 군중들이 서서히 몰려들어 그 수는 3천명이 넘었다. 정오에 맞춰 대청천 언덕에서 김종훤과 김승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만세 소리가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다고 한다.

이후 흥분한 군중들이 헌병주재소를 포위하자 일본군이 발포, 유하리 손명조·김용이, 관동리 김선오 등이 순국했다. 이에 가족들과 시위 주도자들이 시신을 업고 "왜 죽였냐"고 외치면서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러서 주재소를 부숴버렸다.

마치 전쟁과도 같았던 장유 만세운동은 김승태와 김종훤 등 10여명이 "우리가 주동자다. 주민들은 죄가 없으니 풀어주고 우리를 잡아가라"고 나서 헌병대로 끌려가고 나서야 수그러들었다.

이튿날 캄캄한 새벽에 주민 500여명이 정천나루터로 몰려들어 배를 타고 김해 분견소로 면회를 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내용은 김승태의 어머니(당시 60세) 조순남 여사의 내방가사 '김승태만세운동가'에 자세히 실려 있다.

◇ 여성독립운동가 조순남 여사와 사료 '행방'

조순남의 내방가사는 1976년 일부 신문에 '자식 소회가'란 제목으로 잠시 소개됐다.

그러나 이 교수는 원본 사진을 확인해 본 결과 책 표지에 '김승ㅌㆎOOOO가'로 돼 있는 점을 들어 책 원래 제목은 '김승태만세운동가'가 맞는다고 주장한다. 내용 끝부분에 'ㅈㆍ식소회가라'라는 구절은 일제 감시로부터 보호하려고 가사의 의미를 축소한 위장으로 해석했다.

김승태 지사의 증손자인 김융일(77) 씨에 따르면 조부가 감옥에서 풀려나긴 했지만, 일제는 끊임없이 감시했고, 장유만세운동의 생생한 기록이나 다를 바 없는 이 책이 언제든지 발각돼 압수될 가능성이 있어 할머니가 책을 위장해 후세에 보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 중 문제의 소지가 있는 일부 문구를 물로 닦아내고 내용의 말미에 이 책이 갖는 의미를 축소, 단지 어미가 자식에 대한 소회를 기록한 것처럼 꾸몄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김승태만세운동가' 구성을 ①도입부 ②장유 독립만세 운동과 기마대 연행 ③부산 형무소 이송 수감과 면회 ④재판장 모습 ⑤자식과 이별의 정한 ⑥출감 및 환영식 등으로 구분·정리했다.

일부를 소개하면,

…활달ㅎㆍㄴ/우리승태/왕자왕손/후예로서/충성을/위로/하여/왈소ㅎㆍ고깃창션니/충성은/극진ㅎㆍ나/졔고샹/ㅅㆍㅣㅇ각ㅎㆍ면/쳔지가/아득ㅎㆍㄴ즁/모질고/독한/군슈/부ㅅㆍㄴ으로/이슈ㅎㆍ니/…

아들 김승태가 스스로 끌려간 이들의 대표를 자임하고 당당하게 나서는 모습과 모질고 독한 군수가 부산으로 옮겨 수감한다는 내용이다.

연합뉴스

증손자의 설명
(김해=연합뉴스) 정학구 기자 = 1919년 김해 장유에서 3천명이 넘는 주민들이 궐기해 '전쟁'을 방불케 했던 만세운동과 이후 재판 과정 등을 '내방가사' 형태로 기록한 자료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김승태 지사의 증손자인 융일씨가 할머니의 기록 사본을 보며 설명하고 있다. 2019.2.12 b940512@yna.co.kr



내방가사는 원래 두루마리 형식이지만, 이 자료는 34쪽 정도 분량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교수는 "한 독립운동가의 어머니가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친필로 기록해 뒀다. 이는 구전으로 전해 오는 만세운동에 관한 그 어떤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기록이다"라며 "이 기록으로 장유의 만세운동에 관한 증거는 더욱 분명해졌다. 전국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조순남 여사는 일제 감시를 피해 책을 친정 종질녀에게 맡겨 몰래 보관해왔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장유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후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자료가 김해시로 넘어간 뒤 사라졌다.

유족이 2005년 장유 3·1운동기념탑에서 열린 3·1운동 기념식에서 자료를 김해시장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김해시에 이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교수가 지난해 4월께 관련 논문을 준비하면서 유족을 거쳐 시청에 확인해 본 결과 책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유족이 기증 전 자료를 모두 사진으로 촬영해둬 책 내용은 전해진다.

시 관계자는 "당시 담당자는 기억을 못 한다고 하고 기증 증서도 없는 상태"라며 "이 교수와 유족 측 이야기를 근거로 시청 자료실과 시 문화원 수장고 등을 모두 뒤졌으나 없었다"고 밝혔다.

김융일 씨는 "당시 행사장에서 친척 형이 시장에게 전달하는 것을 확실히 봤다. 할아버지와 별도로 증조모를 독립유공자로 보훈처에 신청해놓았다"며 "심사 과정에서 내방가사 원본이 필요할 것 같고 그게 아니더라도 귀중한 자료는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b940512@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