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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성 영화시대 전 제작된 유일하게 필름 남아있는 무성영화 [한국영화 100 일제강점기 조선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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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안종화 감독의 ‘청춘의 십자로’/1934년 촬영… 전통적 권선징악 이야기/골프장 등 1930년대 서울의 풍경 흥미/

안종화 감독, 영화 역사 ‘기억의 전승자’/제작자 박창수, 영화속 악인 연기 눈길/촬영 이명우 역동적 카메라워크 주목/

질산염 필름 지하실서 70년 생존 기적

◆현존 유일의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와 안종화 감독

한국영화사에서 현존(現存)하는 극영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은 안종화 감독의 ‘청춘의 십자로(1934)’이다. 본격적인 발성영화 시대가 열리기 전에 제작된 ‘청춘의 십자로’는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무성영화로서 2012년에 문화재청 제488호 문화재로 등재됐다.

감독 안종화(1902∼1966)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제작한 ‘해의 비곡(1925)’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영화 활동을 시작했고, 1930년 ‘꽃장사’를 시작으로 ‘견우직녀(1956)’까지 모두 12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이미 1930년대 후반에 영화계 중진으로 자리 잡은 그는 여러 영화인 단체에서 중요 직책을 맡는 한편, ‘20년 고투의 형극로, 조선영화 발달의 소고(1938)’ ‘한국영화측면비사(춘추각, 1962)’ 등을 통해 자신이 오래 몸담아온 한국영화 역사와 관련해 중요한 기록을 남긴 기억의 전승자이기도 하다.

1938년 가을에 열린 ‘조선일보 영화제’를 맞아 “오늘까지에 조선영화의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형로고투(荊路苦鬪)의 20년”이었다고 평가한 그는 “여러 영화인들의 악전고투해 온 그 열(熱)에 그윽이 머리를 숙이며”, “선진한 이들의 노(勞)와 공”을 기리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조선일보, 1938년 11월20일) 1960년대 초반 영화계 원로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영화 40년사’ 편찬 작업 책임을 맡기도 했는데, 공교롭게도 오래 와병하면서 작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1966년에 사망했다. 안종화가 ‘한국영화 40년사’ 집필을 구상할 무렵 출판한 ‘한국영화측면비사’는 초창기부터 광복을 맞는 날까지 그 자신이 보고 들은 영화계의 ‘이면비화’를 서술한 것으로, 한 개인의 회고가 곧 한국영화 역사가 된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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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청춘의 십자로’에 출연한 신일선의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청춘의 십자로’의 ‘측면 비사’

‘한국영화측면비사’에서 안종화는 ‘청춘의 십자로’ 제작 배경과 촬영 당시의 에피소드, 줄거리 등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필름이 유실된 상태인 당시로서는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 영화 내용을 적어 내려갔는데, 그가 서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영화 줄거리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농촌 청년 영복(이원용 분)은 봉선네 데릴사위로 들어가 7년 동안 우직하게 일했지만, 결국 봉선(문경심 분)을 주명구(양철 분)에게 빼앗기고 상심해 고향을 등지고 상경한다. 얼마 후 모친이 사망하자 여동생 영옥(신일선 분) 역시 상경하는데, 오빠를 만나지는 못하고 카페에 여급으로 취직한다. 한편, 서울역 수하물 운반부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영복은 근처 주유소에서 일하는 계순(김연실 분)과 친하게 지낸다. 계순은 병든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부양하는 처지인데 빚 독촉에 시달리다 부잣집 아들 개철(박연 분)과 주명구 일당에게 농락당한다. 이를 알게 된 영복은 계순을 위해 개철의 집을 찾아가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여동생 영옥을 만나게 된다. 영복은 영옥 또한 개철에게 유린당한 사실을 알고 분노에 휩싸이고, 개철이 있는 연회장을 습격해 주먹을 휘두른다. 이후 평온을 찾은 영복과 계순은 영옥의 축복을 받으며 새 출발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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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청춘의 십자로’에서 영복이 애인과 누이의 복수를 위해 개철(박연 분)이 있는 연회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농촌에서 도시로 상경한 노동자나 상경은 했으나 마땅한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카페 여급이 된 젊은 여성은 당시 대중 서사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그런 영복과 영옥이 남매인 것도, 헤어진 남매가 뜻밖의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도, 애인과 여동생을 유린한 악인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하층계급 남성도 전혀 새롭지 않다. ‘청춘의 십자로’에서 도시와 농촌, 부자와 빈자(貧者)라는 이분화된 구조와 선악의 양극화, 유형화된 인물과 우연적이고 관습적인 서사 전개 등은 안종화의 전작 ‘꽃장사’나 ‘노래하는 시절(1930)’ 등과도 유사했다.

그런데 ‘청춘의 십자로’는 안종화의 전작에 비해 비평이나 흥행 모두 고르게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기근(飢饉)’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국영화 제작 상황이 좋지 못한 터라 가뭄에 콩 나듯 하는 개봉작에 대한 관객의 기대가 컸고, 이전보다 세련된 연출과 촬영기법, 그리고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아리랑’의 신일선, ‘임자 없는 나룻배’의 김연실, 유도로 다져진 단단한 체격에 활극배우로 명성이 높은 이원용 등의 원숙한 연기가 큰 몫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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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이란 이름으로 영화 ‘청춘의 십자로’에서 악당 개철을 연기한 제작자 박창수(오른쪽).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서울역을 비롯해 주유소, 레스토랑, 카페, 골프장 등 1930년대 서울의 풍경과 풍속을 기록한 화면들이 흥미롭게 펼쳐지는 가운데 당시 촬영을 맡은 이명우의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와 다양하고 도전적인 카메라 앵글, 사과나 신발이나 그림자 등을 클로즈업해 인물의 심리나 사건을 간명하게 드러내는 연출 등이 눈길을 끈다. 개철의 집 장면은 연희전문 교장 에비슨의 사택을 빌려 촬영했는데, 서양식 실내 가구로 채워진 공간을 피하려다 보니 세간이 적은 공간에서 카메라를 거울을 향해 놓고 거울에 비치는 상을 촬영하는 방식으로 연출됐다. 안종화는 이때 발휘된 임기응변과 기지가 장면을 토막토막 잘라 촬영할 경우 버리는 필름이 많아지는 ‘불경제’를 피해야 하는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조선영화’, 1936년 10월)

이 영화는 무성영화 시대의 많은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체계적인 프로덕션을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영화 사업과는 전혀 무관한 ‘전주(錢主)’의 투자로 제작된 작품이었다. 제작자 박창수는 남원 출신으로 서울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배우를 지망하던 청년이었다. 신인 배우 모집에 응모했다가 탈락하고 몇 년 후 사재를 털어 안종화에게 영화 연출을 맡긴 그는 ‘박연’이라는 예명으로 영화 속 악인인 돈 많은 모던보이 ‘개철’을 연기했다. 첫 출연이었으나 함께 출연한 이원용, 신일선, 김연실 등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타고난 재능’을 가진 배우라는 평가를 얻기도 했는데, 안종화의 다른 영화에 출연한 것 외에 특별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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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청춘의 십자로’의 한 장면. 청춘의 십자로 위에 서 있는 두 남녀 영복(이원용 분)과 계순(김연실 분).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발굴과 복원, 그리고 다시 태어난 ‘청춘의 십자로’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청춘의 십자로’는 한국영상자료원이 2007년 국내에서 질산염 네거티브 원판 필름 9개 롤을 수집해 그중 훼손 상태가 심한 1개 롤을 제외하고 8개 롤을 복원한 불완전판 필름이라는 점을 특기해두고자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필름을 수집해온 이래 처음으로 국내 소장자로부터 수집한 것인데, 공기나 열에 취약한 질산염 필름이 특별한 보존 시설도 없는 곳에서 7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적이다. 마치 21세기 복원 기술을 만나기를 기다려왔다는 듯이 어두운 지하실에 밀봉된 상태로 묻혀있던 필름은 복원 후 안종화의 회고와 신문기사 등을 바탕으로 김태용 감독이 편집한 버전으로 공개됐다. 무성영화 시대의 상영 관습을 재현한 김태용 감독의 연출로 변사 조희봉의 해설과 박천휘가 작곡한 음악, 악단의 연주와 막간 가수들의 노래가 어우러진 ‘청춘의 십자로’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풍부한 감각의 경험을 제공했다. 2008년 5월 한국영화박물관 개관 영화제 개막작으로 일반 관객에게 처음 공개된 이래 현재까지 이 영화는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 초대돼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많은 고전영화들이 그렇듯 필름의 생존은 우연이지만, 영화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새로 도착한다.

이화진 한국 영화사 연구자·‘소리의 정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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