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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단독] 서태지의 '난 알아요'도 유물…국립박물관의 유물구입 지침 들여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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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2년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음반. 국립중앙박물관은 현대사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친 유물을 수집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경향신문 자료 사진


국립박물관은 현대 유물이나 작품을 확보해야 하는 것일까, 불필요한 것일까.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해말 현대공예품 4점을 구입한 것을 두고 손혜원 의원과의 관련성 여부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박물관 측은 배기동 관장이 취임할 때부터 강조해온 100년 앞을 염두에 둔 근·현대 유물 확보 정책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구매시점과 이유 등을 둘러싸고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해 구입한 작품은 정광호 교수(공주대)의 ‘The Pot 84130’(2008년작), 서도식 교수(서울대)의 ‘M1001G’와 ‘M2815C’(이상 2018년 작) 등이다. 이들 작품의 가격은 1000만~3000만원이었다. 일각에서는 박물관이 구입 후보에 올린 10건의 작품 중에 손 의원이 판권을 갖고 있다는 나전칠기 작품(‘조약돌’)이 있다는 것에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박물관 측은 “전통문화를 계승한 현대 나전칠기 작품라는 차원에서 후보로 올렸을 뿐”이라면서 “그런 차원에서 가격을 알아봤지만 너무 비싸서 초반부터 배제했다”고 밝혔다.

박물관이 의심을 받는 것은 배 관장과 손 의원이 ‘국립박물관도 현대 유물 및 작품을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유하는 듯한 인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2018년 10월11일 열린 국정감사에서 손 의원은 “지금 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더 늦기 전에 구입해서 후손들에게 20세기, 21세기에 이런 문화를 일구었다는 것을 보여주는게 박물관의 책무”라면서 “이 부분 (박물관이) 꼭 챙겨주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이에 배 관장은 “(손) 의원님이 지적하신대로 우리가 미래 국립박물관을 위해 현대 것을 수집하고 미래 유산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선제적으로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금년부터 (구입을) 진행하려 한다”고 답변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지난해 이뤄진 소장품 범위 확대 추진과, 이에 반대한 학예연구실장의 교체, 현대공예품 구매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손 의원의 압력이나 입김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그러나 박물관 측은 “손 의원의 입김이나 압력이 작용했다면 손 의원 관련 작품을 구입했겠지, 왜 다른 작품을 골랐겠느냐”고 반문했다. 현대작품 구입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교체된 것으로 거명된 민병찬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은퇴 6개월 남은 전임 경주관장을 대신해 국립경주박물관의 장기 프로젝트를 마련해달라는 배 관장의 요청에 따라 발령받은 것”이라고 부인했다.

사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에서 같은 2급인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전보되는 것은 좌천이 아니다. 오히려 학예직에게 경주박물관장직은 ‘선망의 대상’이라 한다. 게다가 민 관장은 2년5개월동안 학예연구실장 자리에 있었으며, 3명 관장(김영나·이영훈·배기동)을 보필했다. 박물관 측은 민 관장의 발령이 자연스런 인사흐름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현대 유물 및 작품 구입이 과연 옳은 지는 다시 한 번 평가해야 할 것 같다.

배 관장은 “국립박물관의 소장품 영역 및 장르 확대는 관장 취임 때부터 지녔던 소신”이라고 강조했다. 배 관장은 “국립박물관의 유물 전시는 ‘1910년 조선황실’로 끝나며, 따라서 핵심적인 유물수집도 대개 1910년대 이전으로 한정됐다”면서 “그렇게 되면 전체 역사를 보듬어야 할 100년, 200년 후의 박물관은 꼬리가 잘린 역사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예컨대 어떤 분야에서 최초를 기록했거나 혁신을 이뤘고, 혹은 역사적인 사건에 관계된 물질은 100년, 200년 후 엄청난 문화유산이 된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에따라 지난해 4월부터 내부 회의와 외부자문회의를 열었다. 외부자문회의에는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박물관 학예직 출신인 오영찬 교수(이화여대), 조인수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목수현 전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이 참여했다. 외부 자문위원회는 ‘박물관의 소장품 및 장르 확대 방침’에 대해 공감하면서 “국립박물관의 전시 정체성에 우선순위를 두고 방향과 확장범위를 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외부 자문위는 현대유물의 구입 기준을 ‘현대 역사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거나 최고의 가치를 구현한 유물, 그리고 근대와 연관성이 있거나 연계를 필요로 하는 현대 작품’으로 정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범위를 확장할 것’을 제안했다. 외부자문위는 이어 이런 현대유물의 구입을 지방박물관의 특성화와도 연계 지을 것을 제안했다. 당시 외부 자문위원회에서 예를 든 현대유물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번째 앨범인 ‘난 알아요’나 ‘3D 프린트’ 등 현대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물질문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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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해 12월 구입한 현대작가의 작품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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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자문위에 참여한 이건무 전 관장은 “기본적으로 국립박물관이 현대 유물까지 수집을 확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전 관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국립박물관은 기본적으로 역사박물관을 지향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면서 “그래서 제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을 때 역사부를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전 관장은 “예컨대 제헌국회의 의사봉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최초음반, 286컴퓨터 등은 국립박물관이 확보해야 할 중요한 현대유물”이라면서 “국립박물관은 향후 역사박물관을 만든다는 장기계획 아래 유물구입정책을 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물관 실무진은 이와같은 외부 자문위의 의견을 토대로 역사자료와 예술품, 물질문화 등 현대유물 및 작품의 3가지 지침을 만들었다. ‘역사자료’는 현대 벌어진 역사적 사건의 산물을 뜻한다. 독립운동과 광복, 한국전쟁, 민주화항쟁, 88서울올림픽, 2002 한·일 월드컵, 2018 평창동계올림픽 등의 자료이다. ‘예술품’은 전통을 계승하고 지금의 예술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정했다. ‘물질문화’는 냉장고와 세탁기, 컴퓨터, 휴대폰, 삐삐, 국산차, 전기차 중에서 최초이거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현대 물질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현대 유물은 몰라도 현대 작가의 작품 구입은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는 않다. 문화재위원인 이광표 서원대 교수는 “현대유물과 작품은 민속박물관과 현대미술관이 확보하지 않느냐”면서 “향후 100년, 200년 후에 국립박물관에 유물이 필요하다면 민속박물관이나 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을 대여 전시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박물관이 역사계 박물관으로 가야 하고 그러려면 현대유물도 구입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는 이 전 관장도 국립박물관의 현대작품 확보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 전 관장은 “지난해말 국립중앙박물관이 현대 작품을 구입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했다”면서 “현대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구설에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박물관은 보통 내부 2차례, 외부 1차례(자문위)의 검증을 거친다”면서 “이번에도 철저한 절차를 거쳐 당대를 대표하고 가치가 뛰어나며 매입 가격도 낮은 작품을 선별해서 구입했다”고 밝혔다.

미래유산 확보차원에서 현대작품을 구입한다지만 생존작가의 경우 아직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평가가 끝나지 않았고, 또 구입을 둘러싸고 구설수에 오를 위험에 있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여론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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