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노딜 브렉시트' 공포… 英 국민, 아일랜드 국적 얻고 생필품 사재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브렉시트 두달 앞두고 "EU 혜택 사라진다" 불안 커져

승객 2000명과 승용차 1059대를 실을 수 있는 '스피릿 오브 브리튼(Spirit of Britain)호'는 영·불(英·佛) 해협을 오가는 대형 페리다. 영국 국기 '유니언 잭'을 꽂고 운항하는 이 페리는 조만간 키프로스 국기로 바꿔달게 된다. 이 배를 운영하는 영국 선박 회사 'P&O'가 22일(현지 시각) 보유한 대형 페리 6척의 선적(船籍)을 모두 영국에서 키프로스로 바꾸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에도 EU의 법인세 혜택을 유지하기 위해 EU 회원국인 키프로스로 근거지를 옮긴다는 것이다. P&O가 보유한 선박의 '국적'을 바꾼 것은 1837년 창사 이래 처음이다.

오는 3월 29일로 예정된 브렉시트가 코앞에 다가왔지만 EU와 약속한 조건으로 사이 좋게 '이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영국 기업들이 서둘러 영국을 탈출하고 있다. 영국 정부가 야당과 대치하면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 불안감과 공포감이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22일 하루 동안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기업이 '브렉소더스(Brexodus·영국 탈출)'를 선언했다고 가디언이 이날 보도했다. 페리 운영 회사 P&O에 이어 일본의 소니가 유럽 본사를 런던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옮기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가전 업체 다이슨도 싱가포르로 본사를 옮긴다고 발표했다. 영국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럭셔리 카를 만드는 벤틀리는 브렉시트에 대비해 부품을 미리 쌓아두고 있다고 밝혔다. 에이드리언 홀마크 벤틀리 최고경영자는 로이터통신에 "브렉시트는 (기업에 대한) 살인자(killer)가 될 것"이라고 했다. 가전 판매점 '딕슨스 카폰'이 TV와 노트북 물량을 미리 확보하고 있고, 반려동물용품 판매점인 '펫츠앤홈' 역시 고양이 사료 등을 쌓아두고 있다고 했다. 노딜 브렉시트가 벌어지면 갑자기 EU 국가들과 사이에서 관세 장벽이 생기고 통관 절차가 까다로워지면서 물류 대란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회계법인 언스트영은 브렉시트를 앞두고 영국에서 다른 EU 국가들로 빠져나가는 자산 규모가 8억7700만유로(약 1조1240억원)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세계은행은 이달 초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을 3%에서 2.9%로 낮추면서 "노딜 브렉시트의 경우 영국과 EU는 물론이고 동유럽과 북아프리카까지 충격이 확산될 것"이라고 했다.

영국 국민도 두려움이 커지면서 제 살길 찾기에 나섰다. 세면용품·상비약·기저귀 등 기초 생활필수품 사재기가 나타나고 있다. 한 식품 회사가 '브렉시트 박스'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상자에는 치즈·치킨 같은 얼린 건조식품 60조각 등 30일치 식품이 들어 있다. 가격은 295파운드(약 43만원)로 비싼 편이지만, 지난달 출시 이후 600여개가 팔렸다. 일간 더타임스는 "노딜 브렉시트 발생 시 비자 문제가 걸려 많게는 500만장의 비행기표가 취소되면서 항공 대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만, 항공사들이 혼란을 가중시킬까 봐 예매 고객들에게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미 EU 국가 국적을 얻어 이중 국적자가 되는 영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에도 EU 여권을 들고 제약 없이 유럽을 오가기 위해서다. 독일 국적을 딴 영국인은 2015년 622명이었지만 2017년에는 7439명으로 12배 늘었다. 영국 옆 나라 아일랜드 국적도 인기가 많다. 아일랜드는 조부모가 아일랜드인이라는 증빙만 있으면 이중 국적을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지난해 아일랜드 국적을 신청한 영국인은 8만8500여명으로 브렉시트가 결정되기 전의 두 배 이상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EU 출신 의사들이 브렉시트 이후 신분 불안을 우려해 본국으로 속속 돌아가면서 영국의 공공 의료 체계도 타격을 입고 있다"고 했다.

브렉시트 예정일이 다가오지만 영국 정치권은 아직도 우왕좌왕하고 있다. 지난 15일 EU와 영국 정부와의 합의안이 압도적인 표차로 의회에서 부결된 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급하게 새로 만들어 발표한 '플랜 B'는 함량 미달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1 야당은 노동당이 22일 아예 브렉시트 여부를 다시 묻는 제2 국민투표를 실시하자고 당론을 정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야당의 제2 국민투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이대로라면 영국 정부의 '플랜 B'도 의회에서 부결될 확률이 높다. 영국 언론들은 6년 전인 2013년 1월 23일 전 총리인 데이비드 캐머런이 전격적으로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제안했을 때 이런 '시계(視界) 제로'의 혼란상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란 평가를 쏟아내고 있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