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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신년기획]다·만·세 100년, ‘일제 현상금 넘버원’ 김원봉, 남에서도 북에서도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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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독립운동가들 ‘서훈 배제’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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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억원.’

일제가 한 독립운동가에게 내걸었다고 전해지는 ‘최고 현상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한 액수다. 당시 돈으로 100만원에 달하는 이 현상금의 주인공은 약산 김원봉(1898~1958년)이다.

경남 밀양 출생인 그는 1919년 의열단을 만들어 조선총독·일본군·친일파 등 암살, 조선총독부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주요기관 파괴를 목표로 한 공작을 이끌었다.

1930년대부터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서 독립군부대인 조선의용대 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냈다. 김원봉의 현상금 액수에는 의열·무장투쟁 선두에 선 그에 대한 일제의 강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북한 정권 참여…잊혀진 독립운동가들

의열·무장투쟁 선두에 섰던 약산

이념 갈등 격화 속 불가피한 월북

유족의 서훈신청 제기 번번이 거부


해방된 조국에서 김원봉은 ‘현상금 액수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수여하는 건국훈장 명단에 김원봉은 없다. 김원봉처럼 일평생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이처럼 예우가 ‘엇갈린’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더라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경우’는 서훈에서 배제하고 있다. 분단 이후 71년간 북한과 적으로 맞서 온 상황인 만큼 정부 명의로 ‘북한 인사’를 드높일 수 없다는 이유다.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 등을 지낸 지청천과 달리 김원봉은 북한 정권의 초대 국가검열상과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김원봉 유족 등이 정부에 수차례 제기한 서훈 신청은 번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김원봉은 북한에서도 잊혀진 인물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훈이 없는 이러한 독립운동가들도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조심스레 나온다. 1948년 이후 남북을 가른 ‘이념’보다 1945년 이전의 독립운동 ‘역사’를 기준으로 독립운동가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차례 정상회담을 갖는 등 남북 화해 흐름이 조성되는 상황도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싣는다.

정부 설명에 따르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지만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될 수 있는 인물은 여럿이다. 한글학자 김두봉(1889~1960년?)이 대표적이다. 주시경의 제자인 그는 1910년대 초 조선어사전 <말모이> 편찬을 진행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고 1940년대 중국 옌안(延安)의 조선독립동맹 주석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주시경의 또 다른 제자로 일제강점기 한글 연구를 하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된 최현배(건국훈장 독립장)는 해방 후 남한에서 한글학회 이사장 등으로 활동했지만, 김두봉은 북한 정권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일성대학 초대 총장 등을 지낸 뒤 1958년 옌안파로 몰려 숙청됐다.

허헌(1885~1951년)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변론한 변호사였다. 김병로(건국훈장 독립장)·이인(건국훈장 독립장)과 함께 ‘민족변호사 3인’으로 불린 그는 1927년 최대 항일단체였던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후 이들의 길은 엇갈렸다. 김병로와 이인은 각각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과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냈지만, 허헌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대학 총장으로 활동했다.

역사대하소설 <임꺽정> 작가로 유명한 벽초 홍명희(1888~1968년)도 있다. 그는 1919년 3월 고향인 충북 괴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며 독립운동에 본격 발을 내딛었다. 1927년 신간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그는 부회장직을 고사하고 안재홍(건국훈장 대통령장)과 함께 전국의 지부 설립에 나서며 실질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가 내각 초대 부수상 등을 지냈다.

■ 여전한 한국전쟁 상처…서훈 가능할까

정부는 이들에 대한 서훈이 필요하다는 주장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국가보훈처는 경향신문에 “북한 정권과 관련 있어도 독립운동 공적이 출중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포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은 평생을 조국독립에 헌신한 분들에 대한 민족적 예우라는 측면에서 일리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는 상황에서 북한 정권에 가담한 독립운동가의 서훈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한국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북한에 맞서 참전한 분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서훈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두봉·벽초 홍명희 등 비슷한 처지

정부, 한국전쟁의 상처 이유로 난색

보안법 등 법적 문제 해결도 필요


북한 정권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서훈에는 법적인 문제도 있다. 상훈법에 따르면 훈장을 받은 사람이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훈장을 회수하도록 돼 있다. 법적으로 적대지역인 북한에서 활동한 이들에게 서훈이 이뤄지더라도 박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국가단체 구성원을 처벌하는 국가보안법 또한 남아 있다.

분단 이전 해방 공간이 이념으로만 재단할 수 없는 복잡성을 지녔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을 했던 민족주의자가 좌익 활동을 한 경우도 있었고, 좌우합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한 시기였다. 또한 남북의 자유로운 왕래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 지난해 정부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사회주의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의 서훈을 적극 검토하기로 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김원봉의 월북 또한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자신의 비서였던 중국인 스마루에게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 정세가 매우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해 살 수가 없다”는 서한을 보냈다.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자서전 <장강일기>에는 “약산이 중부경찰서에 잡혀 들어가 왜정 때부터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몹시 분개하였던 일이 기억난다”는 내용이 있다.

남북이 평화체제의 길로 나아가면

이들의 서훈 여부, 중요 과제 될 듯

분단 이전 해방공간의 복잡성 고려

이념보다 역사 기준 평가 이뤄져야


남북이 앞으로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체제의 길로 나아가게 되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독립운동가’ 서훈은 중요 과제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접근 방법에서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김원봉과 같이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가 숙청당한 인물들도 많다. 북한이 민감하게 여기는 이들에 대한 서훈은 남북 평화 분위기를 긴장시킬 가능성도 있다. 남남 갈등도 발생할 수 있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라며 “지금은 이러한 논의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향후 평화체제를 이루면서 역사 재평가를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광연 기자 lightyea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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