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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연필·잉크의 추억? 요즘 어른들 놀이터는 문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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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시대 ‘핫 플레이스’ 떠올라

홍대·성수동 등 고급문구점 늘어

중년층 “나만의 작은 문화적 사치”

수첩·노트 직접 디자인해 팔기도

젊은층은 실용성보다 취향 중시

‘상상의 공간’ ‘데이트 코스’로 인기

일본·독일 등 외국 제품도 갖춰

중앙일보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문구점 '포인트 오브 뷰' 매장. 보고 있기만 해도 좋은 예쁜 디자인의 문구들이 많다. 당장 실용성은 없어도 '나만의 작은 문화적 사치'를 누리기에 충분한 제품들이다. 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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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로 또는 양손의 엄지손가락만으로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고, 상사에게 보고를 하는 디지털 시대다. 어쩌다 손에 연필이나 볼펜을 쥐고 글을 써볼라치면 손은 잘 쓰지 않던 도구를 금세 알아보고 어색해한다. 디지털 시대는 아날로그 시대의 필기도구들을 영영 잊어버린 걸까.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최근 SNS에서 ‘핫 플레이스’로 주목받는 곳 중에는 문구점이 여럿 있다. 홍대 앞 ‘오발’ ‘흑심’ ‘올라이트’, 성수동의 ‘포인트 오브 뷰’ 등이다. 문구 전문점은 아니어도 각종 일상용품을 모아놓은 독특한 편집 숍 한쪽에는 꼭 문구용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연필 쥐는 법조차 잊어버렸을 것 같은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용품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문구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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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문구점 '포인트 오브 뷰' 의 김재원 대표. 어려서 꿈이 '문방구 주인'이었다는 문구 덕후다. 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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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성수동의 한 건물 2층에 문구점 ‘포인트 오브 뷰(Point of View)’를 오픈한 김재원(38)씨는 그 이유로 “취향의 다양성”을 꼽았다. 그는 “요즘은 누가 산다고 같이 따라 사는 시대는 아니다”라며 “나만의 취향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여러 가지 소비 물건을 살펴볼 때 가격 부담은 적으면서 ‘문화적 사치’로 인정받을 수 있는 문구가 사람들의 관심을 먼저 끈다는 얘기다.

어린 시절부터 ‘문구 덕후’였다는 김 대표는 문구에 스며든 ‘이야기’도 한 몫 한다고 했다. “어머니가 동네 친구들을 모아 하루에 하나씩 퀴즈를 내고 문제를 맞추면 상으로 ‘선생님 지우개’를 사주셨어요. 과목 별로 선생님의 모습이 각각 다르게 그려진 지우개 시리즈를 모으는 재미에 푹 빠졌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어린 시절 학교 앞 문방구를 쉽게 지나치지 못했던 추억이 향수가 되고, 오랜 만에 그 시절의 문구를 만나면 저절로 수많은 이야기가 떠오른다는 것. 실제로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연령층은 다양하다. 젊은 커플들이 데이트 장소로 들리기도 하지만, 나이가 있는 중장년층도 찾아와 물건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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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문구점 '포인트 오브 뷰' 매장. 일본, 독일, 벨기에, 포르투갈, 프랑스, 터키, 인도 등 전 세계에서 찾아낸 문구들을 만날 수 있다. 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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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멋있는 문구를 만나면 이 물건을 쓰고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또 궁금해지겠죠.” 포인트 오브 뷰에는 일본·독일·포르투갈·벨기에·터키·인도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생산된 역사와 품질을 자랑하는 문구들이 많다. 김 대표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이 각각의 문구마다 ‘큐레이션 노트’를 붙여 놓는 일이다. 브랜드 역사와 특별한 이야기들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곳 매장에선 문진이나 모빌 같은 오브제 종류들도 판매한다. “문구는 단순한 실용 도구가 아니라 창작의 도구이기 때문이죠. 무언가를 쓰다 사색과 상상력이 필요한 순간에 고개를 돌려 예쁜 디자인의 문진·모빌 등의 오브제를 보면 아이디어가 더 잘 떠오를 것 같아서 함께 전시하고 있어요.” 도구를 사용하는 재미를 알게 하고 그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는 곳. 그래서 김 대표는 현대의 문구점을 “어른들의 놀이터”라고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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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문구점 '올라이트' 제품들. 이효은 대표가 직접 디자인한 제품들만 파는데 대표상품이 바로 1/2 YEAR DIARY다. 부담 없이 6개월만 쓰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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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문구점 ‘올 라이트(All Write)’는 규모는 작지만 이효은(30) 대표가 직접 디자인한 제품들만 판매한다. 레크리에이션을 전공한 이 대표는 디자인 공부는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여행을 하며, 일기를 쓰며 늘 기존 제품에 부족함을 느꼈고, 결국 ‘내가 쓰고 싶은 제품’을 직접 만들게 됐다고 한다. 예를 들어 1년 치의 두꺼운 수첩을 보면 저걸 언제 다 쓸까 부담스러워 ‘6개월 수첩’을 만들었다고 한다. “쓰다 만 수첩은 결국 버릴 수밖에 없는데 그게 참 아까워서 6개월 수첩을 만들었죠. 여름에 다시 새 수첩을 쓰기 시작하면 새해를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 들어 기분이 좋더라고요. 손때 묻어 종이장이 빵처럼 부풀어 오른 수첩은 볼 때마다 뿌듯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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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문구점 '올라이트' 제품들. 종이 제품들을 주로 판매하는데 모두 이효은 대표가 직접 그리고 디자인한 제품들이다. 이 대표는 "내가 쓰고 싶은 제품을 만드는 게 컨셉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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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는 주로 종이로 만든 수첩과 노트류를 디자인한다. 그는 “종이는 그 때의 감정을 기록하기에 좋은 매체”라며 “마치 노래를 들을 때 그날의 감정에 따라 오래 기억되는 곡이 있듯, 펜의 두께·색깔·필압에 따라 당시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힘들 때 흘렸던 눈물자욱까지 남아 있다. 그런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마음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올라이트의 고객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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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문구점 '올라이트' 제품들. 이효은 대표가 여행지에서 꼭 필요한 메모들만 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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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문구점 '올라이트' 제품들. 여행지에서 이효은 대표가 직접 찍은 사진으로 만든 마스킹 테이프들이다. 독특한 감성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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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에 작은 공방 겸 매장을 열고 있는 ‘늬은’의 송지은(25)·김하늬(30)씨는 오래된 일상 용품들을 취급하는데 얼마 전 ‘고전문방’이라는 기획전시를 열었다. 1940~50년대 일본에서 생산된 빈티지 문구 중 유리 펜과 잉크가 주 대상이었다. “손으로 깎아 모양이 각각 다른 유리 펜을 다들 신기해했죠. 잉크도 술처럼 오래 숙성시키면 색이 은은해진다는 말에도 흥미를 느끼더군요.” 두 사람이 일본 빈티지 문구에 관심을 갖게 된 두 사람 모두 ‘문구 덕후’인 데다 송씨가 일본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이다. 송씨는 “일본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죽을 때까지 그 물건을 쓰는 경향이 있다”며 “이사를 가더라도 그 상점을 찾아가 똑같은 제품을 계속 구매한다”고 했다. 일본의 문구가 왜 유명하고 종류와 브랜드가 많을까 물었더니 송씨는 “일본에선 요즘도 새해 연하장은 손으로 쓴다”며 “손으로 쓴 편지와 글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그들의 욕구와 눈높이에 맞춰 문구는 계속 발전해 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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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 '늬은'에서 전시, 판매 중인 일본 빈티지 제품. 1940~50년대 생산된 유리 펜과 잉크다. 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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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 '늬은' 공방에서 전시, 판매 중인 문구 제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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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저자 스가쓰케 마사노부는 자신의 책 『물욕 없는 세계』에서 “현대의 소비는 ‘홀릭’들이 모이는 커뮤니티 브랜드를 지향한다”고 했다. 자신의 취향과 같은 누군가가 선별해서 물건을 만들고 숍을 꾸며놓으면 ‘공감’이라는 코드 때문에 매니아들이 몰린다는 얘기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문방구보다 세련된 고급 문구점이 관심을 끄는 이유다. 당장 필요한 실용적인 물품은 아니어도 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물건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멀리 있어도 기꺼이 찾아가 오래 머물며 즐기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른들에게는 향수가 샘솟는 놀이터로, 젊은 층에는 취향의 아지트로. 고급 문구점이 사랑받는 이유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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