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4 (수)

그의 죽음이… '만세운동'과 '민주공화정'의 기폭제 됐다

댓글 6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3·1운동, 임시정부 100년 - 1부]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 [4] 고종 승하 미스터리

1919년 1월 21일 새벽 1시, 경술국치 이후 이왕(李王)으로 강등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 전화벨이 가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든 순종은 안색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부왕(父王)이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황급히 덕수궁으로 달려간 순종이 함녕전에 들어섰을 때 이미 고종은 흰 천을 쓰고 누워 있었다. 향년 68세, 1863년부터 1907년까지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였던 고종은 망국(亡國) 9년 뒤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전국으로 번진 '고종 독살설'

승하 직후 '황제 폐하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독살설을 적은 벽보도 나붙었다. 이왕직 장시국장 한창수, 시종관 한상학, 자작 윤덕영 등이 혐의자로 거론됐다. 독살설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개화파 인사 윤치호의 일기다.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에게 전한 말을 기록한 것인데, ▲건강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숨을 거뒀고 ▲시신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크게 부어올라 황제의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으며 ▲시신의 이는 모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30㎝ 정도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고 ▲승하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했다는 내용이다.

조선일보

1919년 2월 28일 고종의 국장 예행연습 때 서울 광화문통 기념비전 앞에서 슬픈 표정으로 덕수궁 쪽을 바라보고 있는 군중의 모습. 오래도록 3·1 운동 당시의 만세운동 사진으로 잘못 알려졌었다. 아래 왼쪽 사진은 1918년 1월 21일 석조전에서 촬영한 황실 가족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황후(순종 비), 덕혜옹주다. 오른쪽 사진은 1918년 1월 15일 신하들의 부축을 받고 있는 만년의 고종(가운데). /서울대 박물관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독살 관련 정보는 당시 일본 궁내성에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발굴한 일본 궁내성 제실(帝室) 회계심사국 장관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일기에 등장하는 정보는 이런 것이었다. 초대 조선 총독이자 전 총리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시켜 이태왕(고종)에게 어떤 '뜻'을 전달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다.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친일파로 일본의 작위를 받은 윤덕영과 민병석 등을 시켜 태왕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고종, 밀사 파견과 망명 기도"

데라우치가 고종에게 전달하려 했던 그 '뜻'이란 무엇일까? 구라토미 일기 중 다른 궁내성 관리의 전언에 그걸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이태왕이 서명 날인한 문서를 얻어서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도모하려고 해 이를 저지하려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1918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협상을 위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었고,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담은 '14개 항'을 발표했다. 여기에 고무된 고종이 밀사를 보내려 했고, 이 때문에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이 된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는 고종이 밀사로 파견하려고 했던 사람은 고종의 5남 의친왕과 김란사 이화학당 교수일 것이라고 본다. 기독교 민족운동가 신흥우의 증언에 따르면 의친왕이 김란사에게 한 궁녀를 보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원본을 찾으면 그걸 가지고 파리에 가서 윌슨 대통령에게 보이며 도와달라고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고종이 해외 망명을 기도했다는 분석도 있다.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국제 정세가 일변하는 상황에서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워 동의를 얻고 베이징(北京)에 행궁을 마련할 계획까지 세웠다는 것이다.

'왕정'에서 '민주공화정'으로

'고종이 독립을 도모하다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은 3·1 만세운동의 커다란 기폭제가 됐다. 고종이 독살 당했다고 믿은 전국의 백성들이 3월 3일 고종의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었고, 이들은 그대로 3·1운동 시위대의 일원이 됐으며, 각 지방으로 내려가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학계에선 고종의 독살을 정설로 받아들이진 않지만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촉발한 민중의 울분이 '왕정 복고'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본다. 장석흥 국민대 교수(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는 "고종이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왕정이 아닌 공화정으로 새 국가를 세우자고 말할 수 없었는데, 그의 죽음으로 인해 독립운동은 곧 '민주공화정의 수립'과 동의어가 됐다"고 말했다.





[유석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