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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고발했지만 보호조치 없어 되레 2차 피해 충격 [심층기획 - 성폭행·폭력에 짓밟힌 스포츠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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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침묵의 카르텔’ 만든 허술한 신고체계 / 체육회 등 신고센터 구축 불구 / 홍보 부족 선수 26.7%만 알아 / 대부분 해당 종목서 진상 파악 / 좁은 관계속 신고자 신상 나와 / 징계 내려져도 재복귀 다반사 / 제3의 기관서 엄정 대처 필요

“제보 이후에 적절한 보호 조치는 마련되지 않은 채 제보만 받겠다고 하는 건 사실 좀 무책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용기 있게 고백한 전 유도선수 신유용씨의 말이다. 지금까지 스포츠 성폭행과 폭력으로부터 피해자들을 보호해줄 제도적 장치와 시스템이 얼마나 부실한지가 드러나는 쓴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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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체육계의 성폭행과 폭력 문제가 제기된 것은 하루이틀이 아니다. 성폭행 문제만 해도 2007년 여자프로농구 박모 감독의 성폭행 미수사건으로 공론화됐고 더 이상의 피해를 막겠다며 여러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스포츠비리신고센터’와 대한체육회의 ‘스포츠인권센터’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의 ‘클린스포츠 통합콜센터’ 등이다. 하지만 당장 성폭행이나 폭력 피해를 당했던 많은 선수들이 이런 단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대한체육회가 실시한 2018년 스포츠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가대표 지도자나 대표팀 선수들 가운데서도 26.7%만이 이런 기관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답할 정도니 일반 선수들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홍보 역시 부족한 실정이다. 대한체육회 정회원 종목단체 60개 가운데 홈페이지에 이런 단체 안내를 공지한 곳은 37개(61.7%)에 그쳤다.

더 큰 문제는 신고를 했다고 해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2009년부터 인권센터 등에 접수된 성폭행과 폭력사건 113건 가운데 체육회가 직접 조사한 것은 4건에 불과했다. 특히 성폭력 27건 중에는 단 1건만을 직접 조사했다. 나머지 사례는 예산과 인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해당 종목단체에 진상을 파악하도록 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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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 홈페이지 화면.


하지만 이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익명으로 신고된 내용이 종목단체로 내려가면서 피해자가 드러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각 종목 협회는 임원부터 지도자와 선수 모두 지연 학연 등 인맥으로 얽혀 있는 좁은 울타리인 탓에 그 내용이 가해자에게 알려지기 일쑤다.

더군다나 특정 인물이나 세력이 파벌을 통해 협회를 사유화했다면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가해자가 이 파벌에 속했을 경우 협회로부터 솜방망이 징계가 내려진 뒤 이른 시기에 다시 현장에 복귀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빙상연맹이다. 전명규 전 부회장이 사실상 빙상연맹을 좌지우지해 오면서 폭력과 성추행 등 물의를 일으켰던 ‘전명규 라인’ 코치들이 다시 지도자로 돌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당연히 피해를 신고했던 선수들은 오히려 더 고통을 당하거나 선수생활을 접어야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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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 대해 서강대 교육대학원 정용철 스포츠심리학과 교수는 지난 16일 국회에서 열린 ‘조재범 성폭력 사태 근본 대책 마련 긴급 토론회’에서 “발설을 택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돌아갈 수 있다면 침묵을 선택했을 거라고 단언한다”며 “다양한 형태의 2차 피해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고 주위의 시선도 싸늘하다”고 피해자가 처하게 되는 현실을 꼬집었다. 결국 이런 일련의 과정이 체육계 성폭행과 폭력 문제를 ‘침묵의 카르텔’로 만들어온 검은 시스템이었던 셈이다.

이런 문제 지적이 이어지자 최근 문체부와 체육회 등이 나서 체육계 성폭행 등의 문제를 국가인권위 등 외부기관이 조사하고 처리하도록 하는 대책안을 내놓았다. 한발 더 나아가 스포츠 성폭행과 폭력 신고 사안을 체육계 바깥에서 전문적으로 다루는 ‘제3의 기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송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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