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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60년 '공구거리' 장인 "떠날 생각하면 마음에 지진이 난다" [밀착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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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김학률씨가 카메라 앞에 섰다. 쇳물에 덴 장인의 손은 딱딱하게 굳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그의 뒤로 철거 중임을 알리는 누런 방진막이 펼쳐져 있다.


주인 떠난 청계천변 거리마다 희뿌연 먼지가 날아들었다. 세운상가 인근 청계천-을지로 ‘공구거리’에 재개발 바람이 불고 있다. 서울시가 허가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1·4·5구역(서울시 중구 입정동)에 투자자가 나타나면서 석 달 전부터 이 지역 철거가 시작됐다. 빈 건물마다 굴착기가 올라섰고, 온종일 날카로운 소리가 진동했다. 60년 넘은 삶의 근거지가 스러져 내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버텨낼 최소한의 여력도 없는 이들은 일찌감치 골목을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일터가 잔해로 변하는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사라진 이웃들을 생각하면 마음에서 지진이 난다.”

김학률(61)씨는 누런 방진막 앞을 서성였다. 10대 때부터 쇳물을 다뤄온 김씨는 ‘주물 장인’이다. 70년대 명동 롯데쇼핑센터에 걸렸던 대형 간판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자동화 기술이 발달하면서 그런 수작업이 설 자리를 잃었지만, 다품목 소량생산에 집중하면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3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김씨의 공방 ‘신아주물’은 길 하나를 두고 당장 재개발을 면했다. 그는 과연 안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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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떠난 청계천변 거리마다 희뿌연 먼지가 날아들었다. 세운상가 인근 청계천-을지로 ‘공구거리’에 재개발 바람이 불고 있다.


옹기종기 장인과 상인들이 모여 있던 이 골목에서는 금형-주물-가공-연마-칠-유통 전 과정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생태계는 서울시가 도시재생이란 이름으로 행한 재개발과 함께 훼손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공생·공존해온 공구거리는 하나의 유기체나 다름없다.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하나가 함께 무너지게 돼 있다. 이 일대 400여 개 업체가 2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김씨는 요즘 한 가지 생각을 되뇐다고 했다. “이제 떠나야 한다. 갈 곳이 없다. 일을 접는다. 어떻게 살지?” 공방 주변 건물들이 맥없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자 공황이 찾아왔다. 그는 대화 내내 눈물을 글썽였다.

김학률씨와 동료들은 지난 11월까지도 거리로 나가 ‘공구거리를 지켜달라’며 한목소리를 냈었다.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당장 오늘내일 생계가 급한 상황에서 일손을 놓고 본격적으로 나가 싸워볼 여력이 없었다. 홀로 작업장을 운영하는 이들은 시위하다가도 손님이 찾아오면 일하러 돌아가곤 했다. 건설사는 가게를 비우는 조건으로 2000만원 수준의 보상금을 제시했다. ‘도장’을 찍지 않는 이들에게는 2~3억원대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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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입정동 공구거리. 장인들이 떠난 뒤 가게마다 방진막이 둘러지고 철거가 시작됐다.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김씨는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더 버텨봐야 가망이 없음을 직감했다. 각자 사정을 뻔히 알기에 누구 하나의 희생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전방위 압박이 들어왔을 때, 한자리에서 50년 넘게 장사했던 사람들도 단 일주일을 버틸 재간이 없었다. 대부분 세입자인 그들에게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가게에서 물건을 빼고, 셔터를 내리고, 건설사 직원에게 자물쇠 열쇠를 반납하고 나면 보상금이 들어왔다. 어떤 가게에서는 금속 20~30 트럭 분량이 이삿짐으로 나왔다. 막대한 이사비용을 지불하고 나면 수중엔 막막함만 남았다.

“한 건설사의 이익을 위해서 서울시가 이리도 쉽게 인허가를 내줘도 되는가.“

김씨는 “거리가 깨끗해지는 것은 찬성하지만, 그것이 모든 흔적을 싹 지워버리는 방식이라면 다시 생각해볼 문제”라고 말했다. 중구청은 작년까지도 ‘을지유람’이라는 이름으로 공구거리를 문화유산으로 재조명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왔다. 김씨는 그의 공방 앞으로 탐방하는 젊은이들이 깃발을 들고 지날 때마다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다고 했다. 철거와 함께 을지유람 코스는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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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입정동 공구거리. 주민 떠난 건물마다 굴착기가 올라섰고, 온종일 날카로운 소리가 진동했다.


‘주민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도시재생, 역사와 환경을 보존하는 도시재생.’

서울시의 도시재생포털이 내세우는 세운상가 일대 도시재생활성화지역의 사업목표다. 현실은 목표에 얼마나 다가갔을까. 생존을 소원하던 입정동 공구거리 주민들은 결국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의 60년 역사가 매몰된 자리에 26층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선다. 콘크리트 먼지 자욱한 골목에서 김학률씨는 “답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하상윤 기자 jonyy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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