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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거대공룡 간호사협, 잇단 ‘태움자살’에 뭘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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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공공운수노동조합 의료연대본부 서울지역지부가 1월 17일 서울시청 앞에서 서울의료원 서지윤 간호사 사망사건과 관련해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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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5일 서울의료원 서지윤 간호사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약물 과다투여. 유서에는 ‘병원 사람들의 조문을 받지 말라’는 내용이 담겼다. 지난 11일에는 전북 익산의 한 병원 간호실습생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유서에는 몇몇 이름과 함께 ‘동료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힘들었다’고 적었다.

간호사들의 극단적인 선택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재가 될 때까지 괴롭힌다’는 뜻인 ‘태움’이라는 간호사 은어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서 간호사 사망 이후 간호사 온라인 커뮤니티 ‘너스케입’ ‘널스스토리’ 등에는 애도와 함께 간호사 노동환경 개선이 시급하다는 내용의 수많은 글들이 올라왔다.

비극이 잇따르면서 ‘대한간호협회’(간협)에 대한 책임론과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간협은 간호사들의 가장 큰 이익단체다. 현직 간호사 대부분이 가입해 있고, 전직 간호사 상당수도 간협 소속이다. 간호사들은 병원 근무를 시작한 첫해에 10만4000원을 회비로 내고 이후에는 매년 7만8000원을 낸다. 간협에 따르면 회원은 20만명 이상이다. 단순 계산해도 1년 회비만 150억원이 넘는다.

■단순 계산해도 1년 회비 150억원

하지만 간호사들은 간협이 정작 간호사 처우개선과 관련해 제대로 된 입장이나 대책을 내놓은 적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2월 사망한 서울아산병원 박선욱 간호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박 간호사의 유족과 공동대책위원회는 1년이 지난 지금도 간협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으며 성명서 하나 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간호사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간협을 성토하는 글이 넘쳐난다. ‘제발 남 일이라고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간협이 알아서 하겠지? 간협이 한 게 뭐가 있나요? 우리 다 알잖아요. 간협 하는 거 없다는 거’, ‘간협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의사나 약사들처럼 똘똘 뭉쳐 단체파업이나 시위도 불가능하고 간호사 처우개선도 힘들겠죠’, ‘문제는 결국 간협의 무능함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내가 다른 협회를 만들고 싶을 정도다.’

‘간호사 인권센터’도 마찬가지다. 간협은 2017년 11월 한림대 성심병원 간호사들이 재단 체육대회에 동원돼 짧은 옷을 입은 채 선정적인 춤을 추도록 요구받은 일이 알려지자 인권센터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간협은 “인권문제와 정신건강에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있는 전문상담원을 둬 상담과 피해예방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인권센터 개소는 감감무소식이다. 간협은 지난해 4월 인권센터 인력 채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힌 바 있지만 인권센터에 지원한 전직 간호사 ㄱ씨는 “8명 이상의 지원자가 있었는데 15년차 이상 경력을 언급하며 구인난을 운운하는 게 의아했다”며 “사실상 인권센터 설립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ㄱ씨는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서 5년간 근무했다. 성격유형검사도구(MBIT) 전문자격을 이수했고 병원에서 성폭력 가해 의사에 대한 징계를 요구한 경험도 있다. 병원을 그만둔 후에는 간호사 업무와 고충에 대한 책을 출간했다. ㄱ씨는 “제가 적임자라고 생각했고 이후에도 간협에 인권센터가 언제 설립되냐고 수차례 물었지만 답이 없었다”고 말했다.

간협 쪽에서는 자신들도 나름대로 시스템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고 얘기한다. 간협 홍보국 관계자는 지난해 3월부터 추진하고 있는 ‘간호 조직체계 및 문화 혁신’ 자정 선언과 10가지 과제 실천을 대표 활동으로 꼽았다. 10가지 과제에는 비인권적 행위 금지와 간호교육 시스템 및 보상체계 개선, 대국민 캠페인 전개, 실효성 있는 정부 정책을 위한 대국회 및 대정부 활동을 진행한다는 내용 등을 담았다. 또 인권센터 대신에 간호사 전용 콜센터인 ‘널스톡’을 만들었다.

간협 관계자는 “인권센터를 만들려고 했으나 간협이 민간단체라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일단 ‘널스톡’을 시작했다”며 “의료사고 및 분쟁이나 간호업무 관련 법률문제, 임금이나 근로조건 관련 노무상담을 한다”고 밝혔다. 이어 “태움과 관련해서는 고용노동부에 상담을 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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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숨진 서울아산병원 박선욱 간호사를 추모하는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피켓을 들고 있다. / 사진=‘고 박선욱 간호사 사망사건 진상규명과 산재인정 및 재발방지를 위한 공동대책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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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들 “캠페인 한다고 태움 없어지나”

그러나 일선 간호사들은 이런 대책들이 ‘보여주기식’이라고 비판한다. 경남지역 종합병원의 11년차 간호사 ㄴ씨는 “간협에서 캠페인 차원에서 ‘태움 방지’ 배지를 나눠줬다. 솔직히 나는 이제 태우는 입장의 간호사지만 포스터랑 배지 붙인다고 누가 안 태우겠느냐”며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널스톡의 존재를 아는 간호사도 많지 않았다. 간호대 학생과 간호사 등 90명이 모인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서 널스톡에 대해 묻자 “처음 들었다”, “언제 만들었나” 등의 답이 돌아왔다. 게다가 널스톡은 이용하려면 면허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전직 대학병원 간호사 ㄷ씨는 “여러 상담센터에서 일해봤지만 개인정보를 입력해야 하는 상담은 널스톡이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3월 내놓은 ‘간호사 근무환경 및 처우개선 대책’과 4년제 대학 간호학과의 편입생 비율을 늘리는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해서도 간협과 간호사들의 목소리는 엇갈린다. 간협 관계자는 대학 정원을 확대하는 대책에 대해 “간협의 의견이 반영됐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간호사들은 간호사 수를 늘리는 게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실제 면허가 있으면서도 쉬고 있는 간호사가 전체 간호사의 절반에 이른다. 복지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간호사 면허 등록자는 35만6000명인데 실제로 일하는 간호사는 17만9989명으로 나타났다. 간호사 수 자체가 부족하지는 않은 것이다.

‘행동하는간호사회’ 소속의 한 간호사는 “대학 정원이 늘어나면 간호사들 빼고는 다 좋다. 정부는 뭔가 대책을 내놓은 것처럼 보이고 대학은 취업 잘되는 간호학과 정원이 늘어서 좋고, 간협은 회비 낼 사람이 많아져서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밑 빠진 독에 아무리 물을 많이 부어도 물은 빠진다. 물을 부을 게 아니라 독을 수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직 간호사 ㄷ씨는 “간호사들이 가장 많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게 월급·휴가·승진이 아니다. 슬프게도 간호사 1인당 환자수가 정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간호대학 졸업생이 많아지면 병원은 간호사를 더욱 하찮게 여기게 된다. 새로 뽑으면 되니까. 간협이 간호사들을 위한다면 이런 정책에 찬성할 것이 아니라 무조건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 “간협회비 보이콧하자” 는 글도

이처럼 간협에 대한 일선 간호사들의 불만은 계속 쌓이고 있다. 지난해 초 간호사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간협 회비를 보이콧하자’며 ‘당장 피켓 들고 나가서 외칠 정도의 자신감은 없지만 협회가 제대로 일할 때까지 회비 내지 않겠다는 의지는 있다. 더 이상 일 안하는 간협 배불리지 맙시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ㄴ간호사는 “간협은 노력을 한다고 하겠지만 11년 동안 그 흔한 홍보문자 하나 받아본 적이 없다”며 “간협 회원이 20만명이다. 그런데 그 20만명은 간협이 대체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그건 간협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아마 간협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행이 너무 오래돼 지금 뭐가 문제인지도 모를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간협 관계자는 “간협은 민간단체이기 때문에 조사권, 수사권, 강제성이 없다. 태움문화를 개선하자는 캠페인을 할 수 있지만 직접적인 개선을 하지는 못한다”면서 “간협 내에는 주니어 간호사부터 간부 간호사까지 다 속해 있기 때문에 한쪽 말만 들을 수는 없다. 중간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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