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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느림보 국민연금, 한진에 칼 빼들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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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한진칼에 공정한 주주권을 행사하겠다.”

1월 16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이하 기금운용위)에 참석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의 말이다. 박 장관이 한진그룹 과 함께 언급한 ‘주주권’은 그동안 국민연금이 행사했던 주주권과는 결이 다르다. 이제껏 투자한 기업의 경영에 개입하지 않았던 ‘종이호랑이’ 국민연금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통해 각종 일탈행위로 기업 가치를 떨어뜨린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에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다. 국민연금이 조 회장 일가의 경영권에 제동을 걸 경우 주주권 행사를 강화하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지침) 도입 이후 첫 경영참여 사례가 된다.

하지만 벌써부터 박 장관의 선전포고가 불발탄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겠다고 언명했지만, 국민연금의 행보가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기업의 경영권 침해를 우려한 재계의 반발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최근 문재인 정부의 친기업 행보도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국민연금은 과연 한진그룹에 대한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통해 ‘주총 거수기’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을까.

적극적 주주권 행사, “할 시간이 없다”

“현실적으로 너무 촉박하다. 결국은 시간 싸움인데 국민연금도, (기금운용위 산하의) 수탁자책임전문위도 다 손을 놓고 있다. 전문위원들의 성향을 보더라도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 의견을 내기가 쉽지 않다.”

한 수탁자책임전문위원(이하 수탁위)은 이렇게 얘기했다. 수탁위는 기존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자문기구인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개편한 전문가 조직이다. 국민연금이 지분을 보유한 기업의 대주주·경영진의 주주가치 훼손 행위를 검토하고 주주권 행사 수준을 결정해 국민연금에 의견을 제출한다.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 여부가 수탁위 손에 달린 것이다.

왜 칼자루를 쥔 수탁위 내부에서 대한항공·한진칼에 대한 적극적 주주권 행사가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일까.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의 지분 12.45%를 가진 2대 주주다. 한진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한진칼 지분은 7.34%를 보유하고 있다. 조 회장 일가(28.93%), 국내 사모펀드(PEF)인 KCGI(10.71%)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주식을 가지고 있다.

국민연금은 한진그룹 계열사 주총에서 과도한 겸직을 이유로 조양호 회장과 조 회장의 장남 조현태 사장의 이사 선임을 반대해 왔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반대표에도 불구하고 조 회장 일가의 이사 선임 안건은 모두 통과됐다. 반대 의결권과 같은 소극적인 주주권 행사로는 국민연금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현재 국민연금이 할 수 있는 ‘의미있는’ 주주제안은 결격사유가 있는 이사에 대한 해임 요구다. 배임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조양호 회장이 기업 가치를 훼손시켰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020년 3월까지 한진칼 대표이사 임기를 남겨둔 조 회장에 대한 해임 요구안이 거론되는 이유다.

조 회장의 이사직 해임 요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연금이 서둘러 주주제안 절차를 밟을 필요가 있다. 보건복지부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발표하면서 자본시장법상 경영참여에 해당하지 않는 주주권부터 먼저 도입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2020년까지 이사 선임·해임과 같은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보류하고 ‘제한적’으로 경영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지금도 주주제안을 통해 조양호 회장에 대한 이사 해임안을 추진할 방법은 있다. 기금운용위가 이사 해임에 관한 주주제안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강력한 주주권 행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실행하기는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주주제안에 대한 모든 절차를 오는 2월 8일까지 끝내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한진칼과 대한항공의 주주총회가 열린 날은 3월 23일. 상법상 주주제안은 해당 기업의 전년도 정기 주주총회로부터 6주 전까지 이사회에 통보해야 하기 때문에 늦어도 2월 8일에는 모든 절차가 마무리돼야 한다. 국민연금은 보름 남짓한 시간 동안 수탁위의 의견을 취합하고 주주들에게 주주제안의 취지와 필요성을 설명하는 절차까지 밟아야 한다.

국민연금이 새 사외이사를 추천해 선임하는 방안도 추진하기 쉽지 않다. 여태껏 후보 선정작업조차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새 사외이사를 찾아 설득하는 과정을 밟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수탁위원은 “우리 쪽으로 공이 넘어오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무언가를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며 “복지부에서 의도적으로 뒤늦게 일정을 잡아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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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남부지방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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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반발·친기업 행보 부담

수탁위원의 면면을 따져봤을 때 ‘전향적인’ 주주권 행사가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초 수탁위는 진보적 색채가 짙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가 이뤄질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내부 분위기는 외부 시선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탁위 위원장을 맡은 박상수 경희대 교수는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비판적인 인사에 가깝다. 박 위원장은 예전 한 언론 기고를 통해 “국민연금기금 운용은 정부의 통제와 관리에 예속돼 있고 국민연금공단의 기금운용본부 역시 정부의 산하기관에 불과한 구조로 짜여 있다”며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는 득보다 독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힌 바 있다. 수탁위 내부 관계자는 “언론에 비친 것과 달리 복지부와 국민연금은 물론 수탁자책임전문위원들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며 “이대로라면 스튜어드십 코드와 관계없이 행사할 수 있는 반대의결권 행사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재계와 보수야당의 반발도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불투명하게 만든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지난해 6월 발표한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채택의 문제점’ 보고서에서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채택할 경우 “자본시장과 기업 경영활동에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며 “국민연금의 기업경영 개입 정당화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지난 16일 국민연금 기금위 회의에서도 경총은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 방침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한국당도 17일 논평에서 “국민의 분노를 이용해 대한항공 경영에 간섭하려는 것은 거대한 부패를 조작하는 일”이라며 “스튜어드십 코드 실시를 전면 중지하라”고 밝혔다.

최근 문재인 정부의 친기업 행보 역시 국민연금으로서는 부담이다. 정부가 ‘대통령과 기업인의 대화’ 이후 규제혁신과 신산업 육성방안을 발표하는 시기에 자칫 국민연금이 기업을 옥죄는 모양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남근 변호사(민변 부회장)는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는 혁신성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정경제도 있다”며 “이번에 국민연금이 대한항공에 대한 주주권 행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다른 기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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