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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왜 대법원 기자회견을 자청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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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월 11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하기 전 입장을 밝히기 위해 대법원 정문으로 들어서다 법원노조원들이 내건 펼침막을 바라보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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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왜 대법원 청사 앞 기자회견이라는 무리수를 뒀던 것일까.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 1월 11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됐다. 그는 그러나 서울중앙지검 청사에 들어가기 전 대법원 앞에 먼저 섰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대법원은 앞서 “양 전 원장 측으로부터 어떠한 협조요청도 없었고, 별도의 허가신청서를 내지도 않았다”고 했다. 양 전 원장의 일방적인 행보였다. 그의 변호인이 출석 전날 언론에 “검찰에 출석하기 전 양 전 대법원장이 오전 9시쯤 대법원에서 입장을 밝힐 예정”이라며 “정문 안쪽 로비에서 기자회견을 하면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피할 수 있겠지만 대법원과 협의가 안 되면 정문 밖에서 할 수도 있다”고 알린 게 전부였다.

양 전 원장이 검찰청사에 들어가는 장면이 찍히는 것에 대해 측근들을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법부 수장이자 국가 의전서열 3위인 대법원의 전직 수장으로서 ‘피의자 신분’이 강조되는 장면은 피해야 한다는 일종의 전략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사진이 찍혀야 한다면 포토라인을 검찰청사 앞이 아닌 대법원 앞에 세우는 것이 양 전 원장이 앞으로 가져갈 이미지 구축에도 유리하다는 조언을 받아들였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일선 판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한 법원 관계자는 “양 전 원장이 원했던 이미지는 대법원 청사가 자신의 뒤로 보이는 가운데 ‘(전) 사법부 수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나 수사방향은 잘못됐으니 판사들은 동요하지 말라’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어차피 양 전 원장이 어느 지점에 서서 발언을 하든 대법원 청사가 전부 다 찍히는 장면은 나오기 어렵다. 왜 무리수를 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다른 판사는 “이미 사법부 구성원 안에서는 ‘그(양승태 전 대법원장)는 그고, 우리(일선 판사)는 우리’라는 생각이 많다”며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일선 판사들은 이제는 크게 동요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일선 판사들은 그들이 무너뜨린 사법부의 신뢰를 앞으로 어떻게 회복할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본인이 원했던 이미지 전략 실패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계획’이 됐다. 양 전 원장은 법원 구성원들로부터도 배척당하는 이미지만 가져갔기 때문이다. 11일 이후 각종 언론매체에 노출되는 이미지는 ‘양승태는 사죄하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 앞에 선 전직 대법원장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전부였다. 일각에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굳이 대법원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데 대해 “내 뒤에 나와 뜻을 같이하는 수많은 판사들이 있다”는 비언어적 표현을 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한국이미지전략연구소 허은아 소장은 1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피의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는 분명히 있어 보이지만 장소 선택에 있어 그 이상의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허 소장은 오히려 양 전 원장이 기자회견을 할 때의 자세를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양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 모습을 보면 손을 절대 앞으로 모으지 않는다. 차렷자세로 기자회견을 하고 질의응답에 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나는 당당하고 잘못한 것이 없다는 비언어적 의사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보인 행동은 ‘나는 죄가 없고, 검찰이 어떤 압박을 해와도 전 사법부 수장으로서 당당하게 대응하겠다’는 일종의 비언어적 표현이라는 설명이다.앞서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측은 “판결이 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죄를 지은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다”는 불만을 공개적으로 털어놓기도 했다. 한 관계자는 “임 전 차장이 검찰에 소환조사를 받기 전까지 미디어에 노출되는 임 전 차장의 모습은 기자의 질문을 피해 도망치는 장면밖에 없었다”며 “구속기소된 이후에는 수의를 입고 포승줄에 묶인 사진만 계속 나온다”고 했다. 임 전 차장은 검찰청사 내에서 포승줄에 묶인 채 호송차량에서 내리는 사진이 찍힌 후 검찰에 크게 항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 전 차장 측은 “정식조사가 아니었고, 구속된 이후 수사기관과 일종의 상견례 형태로 조사받는 자리였는데 사전에 예고도 없이 의도적으로 검찰이 수의를 입은 모습을 언론에 노출시켰다”고 불만을 터뜨린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 관계자는 그러나 “검찰이 먼저 언론에 알린 적이 없으며, 언론 쪽에서 확인이 들어온 것에 대해 답변만 했을 뿐 누구를 의도적으로 망신을 주려고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는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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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된 다음 날인 지난해 10월 28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받기 위해 이송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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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라인에 대한 찬반 논란

실제 대중들은 검찰청사를 배경으로 포토라인에 선 피의자들에 대해 ‘유죄의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1월 15일 대한변호사협회와 법조언론인클럽이 서초동 변호사회관에서 마련한 ‘포토라인,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에서 송해연 대한변협 공보이사(변호사)는 “피의자를 포토라인에 세우고 혐의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일반인에게 유죄심증을 안기고 법관의 심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하는 요소 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그러나 이 같은 비언어적 표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오고 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각국 정상을 만나 악수를 할 때 반드시 자신이 오른편에 서는 방식으로 ‘강대국 대통령’의 이미지를 가져갔다. 오른쪽에 서 있는 인물이 왼편에 서 있는 인물에 비해 서열이 높은 것으로 인식되는 점을 활용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에 대한 여론과는 별개로 현재 비언어적 표현을 가장 적절히 잘 활용하는 정치인으로 꼽힌다. 지난 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각료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방금 김정은으로부터 훌륭한 편지(great letter)를 받았다”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받은 친서를 공개했다. 이때 대통령 앞 테이블에는 김 위원장의 친서와 함께 이란 제재 복원을 예고하는 ‘SANCTIONS COMING(제재가 다가오고 있다)’이라는 문구가 적힌 미드 <왕좌의 게임> 패러디 포스터를 배치했다. 김 위원장의 친서를 소개하는 동시에 국제사회와 미국 내부에 ‘불량국가’에 대한 제재 및 압박을 완화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가 당을 상징하는 색깔(짙은 파랑) 넥타이 대신 줄무늬 넥타이를 매고 나온 것 역시 줄무늬 넥타이가 상징하는 열정과 자신감을 자신의 이미지로 구축하기 위한 비언어적 표현이라는 분석이다. 당시 줄무늬 넥타이를 제안한 사람은 예종석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홍보본부장(한양대 교수)이었다. 그는 마케팅 전문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허은아 소장은 “대중들은 정치인이나 CEO들이 치밀하게 구축한 이미지에서 실제로 많은 영향을 받는다”며 “이 같은 형태의 이미지 마케팅은 앞으로 더욱 활발히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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