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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가라앉지 않는 잠수함’ 신화가 깨졌다 [박수찬의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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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깜깜하지만 감각으로 쓴다. 살 가망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 이 글을 읽기를 바란다. 모두에게 안부를, 절망할 필요도 없다.”

2000년 8월 12일 바렌츠해에서 훈련 도중 침몰한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함 승조원 드미트리 콜레스니코프 대위가 사망 직전 남긴 메모다. 사고 당시 결혼한 지 4개월밖에 안된 그는 사고 직전 불길한 예감을 감지한 듯 군번줄과 십자가를 아내에게 줬다.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당시 상황을 기록한 그의 행동은 러시아인들을 가슴을 울렸다. 지난 16일 개봉한 영화 ‘쿠르스크’는 이때 사고를 토대로 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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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로 침몰한 러시아 해군 핵잠수함 쿠르스크함. 사고 전까지는 가라앉지 않는 잠수함으로 인식됐다. 위키피디아


◆‘강한 러시아’ 민낯 드러낸 쿠르스크함 사고

쿠르스크함은 구소련이 미 항공모함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오스카-Ⅱ급 핵잠수함이다. 1만8000t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의 쿠르스크함은 견고한 내부 구조를 갖춰 ‘가라앉지 않는 잠수함’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쿠르스크함의 신화는 2000년 8월 12일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당시 쿠르스크함은 러시아 북해함대 기함인 순양함 표트르 벨리키함을 향해 두 발의 모의어뢰를 발사할 예정이었다. 오전 11시(현지시간) 쿠르스크함에 장착된 어뢰의 연료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어뢰가 폭발했다. 함수에서 강한 폭발이 일어났고 2분 뒤 더 큰 폭발이 발생했다. 폭발 직후 초당 9만 리터의 해수가 유입되면서 쿠르스크함은 108m 해저로 가라앉았다.

쿠르스크함 침몰 사고는 냉전 종식 이후 위기관리 시스템이 붕괴된 러시아 정부와 군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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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쿠르스크에서 쿠르스크함 승조원 가족들이 구조작전에 의문을 품으며 항의하고 있다. 영화 '쿠르스크' 제공


사고 직후 살아남은 승조원 23명은 잠수함 안에서 애타게 구조를 기다렸으나 러시아 정부는 침몰 사실을 공개하지 않다가 서방측 소식통들이 사고 소식을 보도하자 뒤늦게 침몰 사실을 인정했다. 사고 당시 인근 해역에 있던 미국, 영국 잠수함과의 충돌 가능성을 주장해 ‘책임회피’ 논란에 휩싸였다.

이는 생존자 구조보다 국가의 위신을 더 중시한 것이라는 해석이 적지 않았다. 쿠르스크함이 참가한 훈련은 소련 붕괴 이후 처음으로 진행된 대규모 해상훈련이었다. ‘강한 러시아’를 표방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집권 초기였다는 점도 무력시위에 나서게 된 원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해군의 전략적 억제전력 핵심인 쿠르스크함이 침몰한 것은 러시아군의 위신에 큰 손상을 줄 수 있는 사고였다.

러시아 해군이 효과적인 구조작전을 했다면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 해군은 우왕좌왕하며 위기관리에 실패했다. 구조작업에 나섰지만 생존자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역에 접근하지 못한 채 ‘골든 타임’만 소모해버렸다. 영국과 노르웨이 등 서방 국가들이 구조 지원을 제의했으나 보안을 이유로 거부했다가 뒤늦게 수용했다. 승선인원과 사고 발생 시각 등도 혼선을 빚으면서 정부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푸틴 대통령은 사고 당시 흑해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겼고, 뒤늦게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에도 “전문가가 아닌 자신이 가서 보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라며 구조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와 군이 총체적 난국에 직면했다는 것을 드러낸 이 사고로 승조원 118명은 모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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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스크함과 동급의 핵잠수함인 오스카-Ⅱ급 핵잠수함. 미국 항공모함을 공격할 용도로 개발됐다. 위키피디아


◆사고 발생하면 국가적 재앙…한국은 무사고

세계 각국 해군에서는 “잠수함 보유국은 최소 한 번 이상의 재앙을 당한다”는 소문이 정설처럼 자리잡고 있다. 그만큼 잠수함 운용과정에서 사고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세계 최강으로 평가받는 미국 해군도 잠수함 사고는 피하지 못했다. 핵잠수함 스레셔함 침몰사고는 현재까지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대표적인 사고다.

1963년 4월 10일 미 동부 해안에서 떨어진 대서양에서 최대잠항심도 시험을 위해 잠수하던 스레셔함은 잠수함 조종이 불가능해지면서 수심 2560m의 해저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 사고로 승조원과 정비요원 128명이 숨졌다.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을 적용했던 스레셔함이 침몰하자 미국 해군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원인 파악에 나섰지만 결국 미제로 남았다.

다만 사고 당시 인근 해역에 머물던 지원함 스카이락함은 음파탐지기를 통해 스레셔함이 침몰하면서 발생한 선체가 부서지는 굉음과 폭발음을 녹음했다. 사고 이후 미 해군은 잠수함 승조원과 정비요원들에게 스카이락함이 녹음한 스레셔함의 최후를 들려주면서 안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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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 핵잠수함 라 호야함이 버지니아주 노포크 해군기지에서 창정비를 받고 있다. 미 해군 제공


2017년 11월 15일 승조원 44명을 태운 채 남대서양에서 실종됐다가 지난해 11월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발데스 반도 연안의 수심 800m 지점에서 발견된 아르헨티나 해군 잠수함 산 후안함도 정확한 사고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산 후안함은 아메리카 대륙 최남단 우수아이아에서 마르 델 플라타 기지로 향하던 중 환풍구 침수에 따른 전기 시스템 고장을 보고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 사고 이후 산 후안함에 결함이 잦았고, 정비에 문제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아르헨티나 정부는 거센 비난 여론에 직면했다.

잠수함 사고는 국가 간의 문제로 비화되기도 한다. 2001년 2월 미국 하와이 해역에서 미국 해군 핵잠수함 그린빌함이 수면 위로 부상하던 도중 일본 실습선 에히메마루호와 충돌했다. 에히메마루호는 침몰했으며 9명이 사망했다. 사고 조사 결과 그린빌함이 수면 위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바다에 장애물이 있는지 여부를 살피는 등의 부상절차를 준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논란을 빚었다.

2009년 2월 영국 핵잠수함 뱅가드함과 프랑스 핵잠수함 르 트리옹팡함이 북해에서 충돌한 사고는 양국이 갖고 있는 수중구역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 발생했다. 이 사고로 뱅가드함은 함수가 함몰됐고, 르 트리옹팡함은 음파탐지기가 손상됐다.

군사기밀 등을 이유로 사고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2009년 6월 남중국해에서는 중국 잠수함과 미국 해군 구축함 존 메케인함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존 메케인함의 예인식 음파탐지기(TASS)와 중국 잠수함이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피해상황 등 구체적인 사안은 공개되지 않았다. 2008년 7월에는 중국 해군으로 추정되는 잠수함과 일본 어선이 일본 근해에서 충돌했다. 이 사고로 어선이 가라앉으면서 4명이 숨지고 13명이 실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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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해군 잠수함 박위함이 지난해 6월 1일 림팩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 입항하고 있다. 미 해군 제공


한국 해군은 1992년 10월 잠수함 장보고함을 인수한 이후 수많은 해외 훈련과 작전을 수행하면서 단 한차례의 사고 없이 잠수함을 운용하고 있다. 해군 잠수함 승조원들의 숙련도와 정비, 교육 등 잠수함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우수성을 입증한 것으로 재래식 잠수함 운용국가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 해군은 2020년대 3000t급 잠수함을 전력화해 한반도 인근 해역에서의 수중작전을 활성화한다는 방침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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