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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커버스토리]‘그날’ 이후 변한건…죽이진 않는다, 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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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용산참사가 발생한 2009년 1월20일, 불타는 남일당 망루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금 개발지구에선 사람을 죽이진 않아요. 세입자들이 죽지 않을 만큼만 개발합니다. 용산참사 이후 변한 건 ‘죽이지 않는 선’, 거기까지입니다.”

재개발이 진행 중인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4구역의 백채현 전국철거민연합 청량리 위원장은 “죽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용산참사 이후 10년, 재개발·재건축 지역의 폭력적 강제집행에 변화가 있는지에 대한 답이다. 2015년부터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된 청량리4구역은 최근까지도 철거용역을 동원한 강제집행이 이뤄지는 등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제 죽이진 않는다’는 그의 말과 달리, 2018년 한 해에만 철거민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2월 뉴타운 사업으로 재개발이 진행되던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선 공장 세입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턱없이 낮은 이주보상비에 이 세입자는 공장 옮길 곳을 찾지 못했다. “재개발 개XX들 날강도 도둑놈들.” 그가 메모지에 남긴 유서에는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난해 12월 서울 마포구 아현2구역 세입자 박준경씨(당시 37세)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박씨는 그해 9월 강제집행으로 살던 집에서 강제퇴거를 당한 뒤 철거지역을 떠나지 못한 채 떠돌았다. 석 달간 철거지의 빈집을 전전하던 그는 빈집에서도 내쫓기자 사흘간 노숙생활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광고 전단지 뒷면에 남긴 유서에는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자살을 선택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들은 인간 사냥꾼이었습니다.” 서울 노원구 월계2동 주민 김진욱 월계인덕마을 위원장은 철거용역 300여명이 인덕마을에 몰려온 2016년 4월26일을 여전히 ‘악몽의 날’로 기억한다. 철거용역들은 소화기를 뿌리며 주민들을 무차별 폭행했다. 김 위원장도 이날 폭행으로 앞니 3개가 부러지고 오른쪽 갈비뼈가 골절됐다. 주민 24명이 각각 전치 2~6주의 상해를 입었지만, 경찰과 법원 집행관들은 폭행 현장을 외면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주민들이 진정을 넣은 지 2년이 지난 지난해 3월에서야 용역 폭력을 수수방관한 경찰 책임자에 대한 경고 조치와 강제집행 대응 지침을 마련하라는 권고를 했다. 인권위 조사 결과 주민들은 112에 모두 28차례 신고했지만, 관할 지구대는 신고자에게 사후 고소방법 등만 안내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 위원장은 “4년간 억울함과 분노로 싸웠지만, 사익사업인 재건축 정비사업이라 상가 세입자들은 영업보상은커녕 맨몸으로 길거리로 쫓겨났고, 토지 가옥주들도 시가의 50~60%에 그치는 감정평가로 재산이 반토막 났다”고 했다.

기반시설까지 함께 정비해 공익사업 성격을 인정받는 재개발은 도시정비법에 따라 최소한의 원주민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사익사업인 재건축의 경우 세입자 보상 및 이주대책이 전무하다. 박준경씨가 살던 아현2구역 역시 아현뉴타운 8개 구역 가운데 유일한 재건축 지역이었다. 이광남 아현2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은 지난 12일 박씨의 사망 40여일 만에 열린 영결식에서 “조합이 용역깡패를 고용할 비용 일부라도 세입자에게 마련해줬다면 (박씨가 사망하는)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철거지역 주민과 전문가들은 전국 곳곳 정비지역의 갈등 해결 방법으로 입법을 통한 해결을 꼽는다. 용산참사 직후에도 철거지역 세입자 보상 문제가 쟁점이 됐지만, 참사 이후 상가 세입자에 대한 휴업보상금이 3개월치에서 4개월치로 늘어난 것 외에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2015년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으로 임차인이 상가 권리금을 일부 보호받게 됐으나 용산이나 인덕마을처럼 재개발·재건축으로 상가에서 나와야 하는 경우는 제외됐다. 막대한 권리금과 시설투자비를 들여 가게를 열었지만, 개발로 얼마 되지 않는 휴업보상금만 들고 쫓겨나는 세입자들이 저항하다 강제철거로 이어지는 ‘도시개발 잔혹사’가 반복되는 것이다.

이원호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합법적으로’ 되풀이되는 각종 개발 사업과 이에 따른 강제철거를 막기 위해 개별 법률의 개정도 필요하지만, 강제퇴거금지법 제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현행 개발사업은 도시정비법 등 절차법에 의해 추진되기 때문에 절차적 하자만 없으면 인허가로 이어진다”며 “근본적인 주거권 보장과 재정착 권리를 명시한 법 제정으로 용산참사와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제퇴거금지법은 용산참사 이후 18대 국회에 첫 발의됐지만 18대에 이어 19대 국회에서도 논의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20대 국회 들어서도 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에 의해 같은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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