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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없어지기 전에…" 을지면옥 재개발 소식에 서글픈 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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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면옥의 서글픈 ‘겨울철 특수’
오래된 단골 "도시재생이 뭔데 내 맛집을 쓸어 버리나"분노
서울시 "사업인가 떨어져…없던 일로 돌릴 순 없다"

"을지면옥에서 먹는 마지막 냉면일까봐 찾아왔어."

영하 2도, 한겨울 냉면집은 만석(滿席)이었다. 지난 17일 정오 을지면옥 앞에는 긴 줄이 섰다. 원래 냉면은 겨울 음식이지만, 아무래도 겨울이 되면 손님이 준다.

그래도 서울 3대 냉면집으로 꼽히는 을지면옥은 "사시사철 손님이 끊이지 않는 편이지만, 한겨울에 이렇게 손님이 몰리는 일은 드물다"고 주인 홍정숙(62)씨는 전했다. 이날 점심시간에는 200여명이 넘는 손님이 일시에 몰렸다.

직원들은 ‘재개발 특수’라는 표현을 썼다. 서울시의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을지면옥을 포함한 을지로 노포(老鋪)들이 대거 철거 위기에 내몰렸다는 보도가 나오자, "없어지기 전에 가보자"는 마음으로 찾는 손님이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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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정오 서울 중구 을지면옥을 찾은 손님들이 자리를 잡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서고 있다. /박소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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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지기 전에…" 한겨울 냉면집 ‘재개발 특수’
"을지면옥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오랜 단골들은 분노했다. 단골손님 김모(60)씨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사장부터 찾았다. "없어진다고 해서 이렇게 왔어. 아주 바쁘시네. 그런 시장을 뽑은 게 잘못이지!" 이 말에 점원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30년 단골 성기연(67)씨는 "겨울에 이런 줄이 선 것은 처음 본다"고 했다. 성씨는 없어지기 전에 한번이라도 그 맛을 느끼고 싶어서 15분을 기다린 뒤에야 ‘냉면 한 젓가락’을 할 수 있었다.

이날 을지면옥에는 젊은이들이 더 많았다. 지난 15일 이후 ‘네이버 트렌드’에서 을지면옥이라는 키워드의 검색량은 평소보다 열 배 이상 늘었다. 을지면옥 철거위기 보도가 나온 직후에 생긴 변화다. 직장인 안정희(35)씨는 "인스타그램(SNS 일종)에서 을지면옥이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를 접하고 달려왔다"고 했고, 대학원생 도성호(26)씨도 "도시재생이 뭔데 내 오랜 맛집을 쓸어버리나"라며 "이 가게에 서린 내 추억까지 갈아 엎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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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을지면옥 철거 위기 보도가 나온 직후 ‘을지면옥’에 대한 네이버 검색량은 10배 이상 늘었다. /네이버 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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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은 때아닌 겨울철 특수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우리 직원이 20명도 넘어요. 기본 10년 이상 일하신 분들입니다. 이 사람들도 ‘가게가 정말 없어지면 우리 어디로 가느냐’고 묻습니다. 제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일자리 어쩌고 하더니 냉면집 일자리는 시장님 눈에는 일자리도 아닌가요." 홍씨가 한숨을 쉬었다.

‘서울 3대 평양냉면집’으로 꼽히는 을지면옥은 1985년 이 자리에 개업했다. 1969년 경기도 연천 전곡면에서 처음 평양식 냉면집을 낸 홍영남씨의 딸이 서울에 낸 식당이 바로 을지면옥이다. 동치미 섞은 국물의 심심한 맛에 중독된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북 실향민들은 ‘고향의 맛’이 그리워 이 가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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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면옥 냉면./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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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면옥 뿐만이 아니다. 을지로에 자리한 대표적인 노포 안성집(1957년 개업·돼지갈비), 양미옥(1992년 개업·양대창), 통일집(1969년 개업·소고기)도 철거 위기를 맞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도심 주거 공급’을 위해 세운3구역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포들을 밀어내는 대신 이 지역에는 지상 30층 규모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세월이 맛을 만들지, 음식이 맛을 내느냐" 노포들의 분노
서울시 측은 "유명식당들은 다른 곳으로 옮기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우리는 써밋타워(주상복합건물)로 옮길지 제안만 할 뿐이고, 이주 여부는 오래된 가게들이 각자 알아서 결정하면 된다"고 말했다.

노포들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라고 했다. 을지면옥 주인 홍정숙씨는 "세월이 맛집을 만들지 음식이 맛집을 만드느냐. 펜대 굴리는 높으신 나리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거다. 이주하면 33년 전통 을지면옥은 사라지는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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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집 주인 최점분씨가 사진을 가리키며 50년 가게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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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거리에서 50년 전통 안성집 주인 최점분(81)씨도 "시장님이 아무리 좋은 자리를 내준다고 해도 단골들과 함께 해 온 이 자리를 내주기 싫다"고 했고, 3대를 이어온 조선옥 김진영(54)씨도 "해외에서는 한 자리에 100년 넘게 뿌리 내린 ‘장인(匠人)식당’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어떻게 된 게 오래된 식당이라면 없애려고 난리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해 했다.

을지면옥을 비롯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2구역 땅주인 14명은 "절차상 하자가 있어 재개발 계획은 무효"라는 취지의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을지로 명물인 ‘공구거리’의 상가들도 가세했다. 한때 ‘도면만 가져오면 우주선도 만든다’고 했던 곳이다. 쫓겨날 처지의 공구거리 상인들은 연장을 드는 대신 ‘재개발 반대’라고 적힌 붉은 조끼를 입었다. 골목마다 ‘대책 없는 청계천 재개발을 결사 반대한다!’란 문구가 쓰인 포스터가 나붙었다.

을지로 일대 상인들은 지난 17일 중구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구청 앞에 ‘태진상사·선우상회·대흥기기·삼성사·동아펌프공사’라고 적힌 오래된 공구가게 이름이 새겨진 깃발들이 올라왔다. 30여명의 영세상인들은 "도시재생이란 이름의 재개발을 중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청까지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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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청 앞에서 청계천 일대 공구상인들의 ‘가게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들어 올리고 있다. /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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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커지자 박 시장은 "재개발 사업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서울 중구청 측은 "이미 사업승인이 떨어진 지역은, 보상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철거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시장의 (재개발 개점토)발언에 대해서는 내부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김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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