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신년기획]다·만·세 100년,“동양의 인걸” “위대한 대기”…일제의 극찬 기록 속에 영원히 박제된 ‘조선 귀족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완용 등 ‘매국노’들에 최상급 인물평…친일행위자 가려내는 증거물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근대 동양의 인걸”, “불세출의 어진 사람”, “가장 위대한 대기(大器)”….

일제가 이완용(1858~1926년)에 대해 내린 평가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인물. ‘매국노 중의 매국노’로 불리지만, 일제에겐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 단계마다 앞장서 준 공로자였다. 일제는 한일강제병합에 공을 세우고 작위를 받은 ‘조선의 귀족들’을 극찬하는 자료를 남겼다. <신사보감> <조선공로자> 책자 등이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선 <용의조선인> <성행조서> 등에 악평을 실었다. “흉악” “잔인” 등 범죄자처럼 묘사한 게 대부분이다. 일제의 뒤틀린 인물평은 ‘매국’과 ‘독립’이라는 엇갈린 길을 걸었던 이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또 다른 자료다.

가장 많은 찬사가 쏟아진 인물은 역시 이완용이다. 일제는 <신사보감>에서 1910년 경술국치 때 이완용의 활약을 전하며 “그의 대정치가적인 민활한 수단으로 그 조획이 원만하게 처리”됐다고 썼다. <조선공로자>에선 이완용을 “천하의 대국을 먼저 깨닫고 민생으로 하여금 천년 후까지 복지의 혜택을 누리게 하였던 늠름하고 의연한 큰 그릇”이라고 표현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인류를 구출하여 산하를 기쁨으로 넘치게 하기 위하여 희생이 되어 의협을 발휘하는 구세주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 것인가.”

한일강제병합 뒤 그의 처신에 대해서도 “조선과 조선 민생의 복지를 위하여 그 삶을 마치기까지 심신을 다하여 노력 공헌한 바를 잊을 수 없으며…소인배 무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대기(大器)였다”고 기록했다.

일제 편에 섰던 이들에겐 최상급의 수식어가 동원됐다. 정미칠적 중 한 명인 송병준에 대해선 “병합 전후에서의 노력과 공로는 특기할 만하여 후세에 전할 것이 많다”면서 “가장 걸출한 존재”라고 극찬했다. 을사오적에 든 이근택은 “눈빛이 형형하며 비상한 지략이 있어 한성 정계 중 일등”이라고 평가했다. 을사오적, 경술국적인 박제순은 “청렴하고 고결하며 학식이 해박”했다고 썼다.

독립운동가들은 ‘배일사상자’라며 인품과 인상까지 깎아내렸다. 배일사상 여부가 유일한 판단기준이었던 셈이다. 3·1운동 당시 학생들을 이끈 김원벽은 “흉악하고 잔혹한 인상, 잔인하고 교만함” “배일사상이 치열하여 사회주의 숭배로 기우는 경향이 있는 자”라고 평가했다. 의열단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김성근은 “불령 운동에 광분한 자”라며 “치열한 배일자로서 해외의 불령한 무리들과 연락하여 흉포한 일에 자꾸 나타날 우려가 있는 자”라고 했다.

‘일제의, 일제에 의한, 일제를 위한’ 인물평은 일상에도 파고들었다. 일제는 각 학교나 마을에 3·1운동 참여자들에 대한 성행조사를 요구했다. 국사편찬위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에는 1919년 3월17일 경성고등보통학교가 검시국에 보낸 ‘소요사건 관계자 평소 성행조사’ 서류가 있다. 3·1운동에 참여한 4학년생 김성숙에 대해선 “평소부터 반항적 기질이 있고, 때때로 교관에게 반항하는 태도를 나타내어 훈계당한 일이 있다”며 “3월1일 밤과 2일에 기숙사생을 선동하여 퇴사하도록 권유한 형적이 역력하다”고 기록했다. 3·1운동 참여 후 옥중 순국한 3학년생 박수찬은 “종전과 달리 교사를 대하는 태도가 약간 불온하여 사람의 분격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했다.

당시 개개인의 삶에 절대적 권력을 휘두른 일제의 평가는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가려내는 증거물이 됐다. ‘부귀영화의 길’을 좇았던 조선의 귀족들은 작위 대신 ‘매국노’라는 수식어로 불린다. ‘죽음의 길’이었던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2019년에도 ‘살아있는 영혼’으로 기억된다.

[인터랙티브] 맹렬한 무장투쟁가, 아나키스트 역사가…나는 어떤 독립운동가였을까?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00년 전, 대한독립을 주창하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들었고 만세를 불렀고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평범한 이들에게 3·1운동은 삶의 전환점이 됐다. 독립운동가가 된 이들의 목표는 하나였지만, 택한 방법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만주에 정착해 무장투쟁단체를 조직했고, 누군가는 머나먼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았다. 이념과 노선도 민족주의를 기본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여성해방 등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그렇게 같은 독립운동 안에서도 누군가는 맹렬한 무장투쟁가로, 누군가는 여성운동을 주도하는 대중운동가로 궤도를 달리했다. 만약 내가 독립운동가라면 그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내 선택과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는 누구였을지 알아보자.

▶ [인터랙티브]나는 어떤 독립운동가였을까? 링크 클릭이 안 될시 주소창에 http://news.khan.co.kr/kh_storytelling/2019/myact/ 를 입력해주세요.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