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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좁은 통로에 '다닥다닥'…불안·공포 꽉 찬 '도심 속 벌집' [행복사회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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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무방비’ 고시원 근본 대책 시급

불나면 인명피해 유독 커/출구 적고 방 다닥다닥… 방염시설 미비/지난해 전국 58건 화재… 사상자 22명

10곳 중 3곳 ‘규제 사각’/정부 ‘다중이용업소’로 지정 소방 규제/법 시행된 2009년 前 건물엔 적용 안돼

소방청 관련법 개정 나서/ 노후 건물도 스프링클러 의무화 추진/“인권 관점에서 주거권 보장책 수립을”

세계일보

서울 용산구의 한 고시원에서 사는 권기범(57·가명)씨는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 사건을 보며 수년 전 악몽을 떠올렸다. 국일고시원처럼 통로가 좁고 피난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쪽방에 살다 화재로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이다. 남대문경찰서 뒤편의 쪽방에서 살던 권씨는 전기합선으로 화재가 발생하자 3층에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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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9일 발생한 종로 고시원 화재는 7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형 참사를 빚었다. 이후 고시원 등 사회 빈민 주거지역의 화재 안전시설 보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대부분 고시원은 여전히 화재에 취약한 상태로 방치돼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화재 후 지금의 고시원으로 이주한 권씨는 “지금도 언제 어떻게 불이 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무섭다”며 “비상구도 없고 완강기도 전체 고시원에 하나뿐이라 만약 새벽 시간에 불이 나면 국일고시원 때처럼 여기도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그는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출입구에서 가깝고 창문이 있는 방에 살아야 한다”며 “복도가 좁아 만약 방문이라도 열려 있으면 꼼짝없이 갇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7명의 사망자와 12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국일고시원 화재사건 이후 고시원을 비롯해 사각지대에 놓인 비주택 주거시설의 화재안전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가난한 청년과 중장년층이 안전하지 않은 비주택 시설에 몰리자 방재의 관점에서 안전대책을 펼침과 동시에 인권의 관점에서 비주택 주거시설 문제에 접근해 근본 대안을 내놔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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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 10곳 중 3곳은 규제 사각지대… 간이스프링클러조차 없어

17일 소방청에 따르면 지난해 다중이용업소로 등록된 고시원에서 발생한 화재는 58건이었다. 전체 다중이용업소 중 일반음식점(177건), 노래연습장(77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불이 났다. 2016년 87건, 2017년 72건으로 화재 발생 건수는 다소 감소하고 있지만 인명피해는 2016년 8명, 2017년 6명, 지난해 22명으로 반대로 증가했다. 방염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고시원에서 불이 나면 확산속도도 빠를 뿐만 아니라 좁은 공간에 밀집된 인원이 살아 인명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2008년 7월 경기 용인시의 한 고시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7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다. 66개 방이 비좁은 통로를 중심으로 다닥다닥 붙어있어 대피하지 못한 이들의 피해가 컸다. 출구는 비상구를 제외하면 한 곳뿐이었으며, 환기시설도 제대로 없었다. 같은 해 10월 강남구 논현동 고시원에서도 화재가 발생해 6명이 사망하고 7명이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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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9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종로구 관수동의 국일 고시원. 간판 바로 왼편이 2층 비상구. 새벽 시간 발생한 화재로 7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다쳤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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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건의 화재로 고시원 안전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정부는 2009년 ‘다중이용업소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다중이용업소법)을 개정했다.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고시원이 다중이용업소로 규정되고 화제에 대한 규제를 적용받기 시작했다. 간이스프링클러 설치와 영업장 신규 등록·내부구조 변경 시 소방본부장에게 신고해야 하는 등의 화재예방 대책이 포함됐다. 그러나 개정안이 법 시행 시점인 그해 7월 8일부터 적용돼 그 전에 영업하고 있던 고시원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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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국일고시원은 고시원으로 등록되지 않아 다중이용업소로서 고시원으로 분류되지 않았으며 2009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에서 운영 중이었기 때문에 소방서에서 받은 필증만으로도 영업이 가능했다. 규제 사각지대에 방치된 고시원은 일반 단독주택부터 상업용·숙박용·업무용 등 다양한 건물에 전부 혹은 일부 분포돼 있다.

국일고시원처럼 2009년 7월 8일 이전에 개업해 규제 사각지대에 놓인 고시원은 전체 고시원 1만1900개 중 28.6%(3403개)에 달한다.(2016년 10월 기준) 전국 시도 중 고시원이 가장 많은 서울은 규제 밖 고시원 비율이 31.6%였다. 광주시(49.7%)는 규제 사각지대 고시원 비율이 가장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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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21일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 현장 앞에서 전국세입자협회 회원들이 주거권을 위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2009년 이전 고시원도 소급적용 추진

규제 밖 고시원의 안전 강화 대책으로 소방청은 2009년 이전 영업을 시작한 고시원에 2년간 유예기간을 주고 스프링클러를 의무 설치하는 방안을 담은 다중이용업소법 개정을 준비 중이다. 판잣집과 쪽방촌, 고시원 등 비주택 주거시설의 화재예방을 위한 환경개선사업도 추진한다. 가스 설비 수리, 장판·도배 교체, 소화기·화재경보형 감지기 등을 보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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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정부의 공공임대주택 정책의 최우선은 가난한 사람이 돼야 한다”며 “공공임대주택을 만들어도 신혼부부와 청년 등에 밀린 사회 취약계층은 결국 불안정한 비주택 주거시설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최 소장은 “주택과 부동산은 투자와 투기의 대상 이전에 주거권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주거시설”이라며 “인권의 관점에서 고시원·쪽방촌·비닐하우스 등 35만호의 비주택 주거시설에 사는 시민들의 주거환경 개선을 우선순위에 두고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선 관리·감독 어떻게

-英, 다중주거시설 허가제… 안전·위생 엄격 준수

비주택 주거시설에 대한 규제와 안전대책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영국의 임대시설 허가제도가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셰어하우스‘(공유주택)를 운영하는 임대인에게 안전·위생·주거 복지에 대한 의무를 부여한 제도로 열악한 환경에 놓인 주거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다.

17일 영국 주택·지역사회·지방정부에 따르면 영국 지방정부는 다중주거시설에 대한 허가제도를 운용 중이다. 지방정부가 다중주거시설(동일 가구가 아닌 3인 이상의 사람들에 의해 점유되는 주택으로 부엌이나 욕실 등 주거시설의 일부를 공유하는 주택)의 영업을 허가하는 제도다. 공유주택으로 대표되는 다중주거시설은 저렴한 가격 때문에 학생과 이민자 등 사회 취약계층의 거주 비율이 높다.

다중주거시설 허가제도는 1999년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학생용 공유주택에서 발생한 화재로 2명의 대학생이 숨진 뒤에 의무화됐다. 화재 당시 건물 내 화재감지기는 작동하지 않아 초기 대피가 늦었을 뿐만 아니라 창문마다 설치된 쇠창살은 탈출을 가로막았다.

공유주택을 운영하려는 임대업자는 주택의 시설 유지·관리 등에 대한 법률적 의무를 준수해야 지방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지방정부마다 허가 유효기간이 다르지만 보통 5년마다 허가증을 갱신해야 하며 이를 어기면 벌금이 부과된다. 임대업자는 △화재경보기 설치를 포함한 화재 안전조치 △가스 안전점검과 △전기설비 안전 인증 △입주자 수에 맞는 조리·목욕시설 마련 등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임대인은 관련 법 시행령 등과 관련해 범죄기록이나 위반 사실이 없어야 허가증을 받을 수 있다.

한편 미국 정부는 1995년 임차인 거주 주택 중 연방정부의 주택바우처 지원을 받는 주택에 ‘주택품질기준’ 준수를 의무화했다. 주택품질기준은 위생시설, 취사, 쓰레기 처리, 공간과 보안, 냉·난방 환경, 조명과 전기, 구조와 자재, 실내공기의 질, 물 공급, 납 성분 페인트, 접근성, 입지와 지역사회, 위생상태, 화재경보기 등 총 13가지의 평가요소들로 구성돼 있다. 지방주택청은 처음 임차인이 입주한 시점부터 매년 주택심사를 실시, 주택의 적격 여부를 평가한다.

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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