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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남극에선 왜 ‘가짜 머리’ 달고 도둑갈매기 연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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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인터뷰-김정훈 극지연구소 박사

“공격하는 새를 때려줄 도구인 줄 알았는데 보호장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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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갈매기한테 뒤통수를 제대로 맞으니 하늘이 노래지더군요.”

15년째 해마다 겨울이면 남극에서 새를 연구하는 김정훈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004년 남극 킹 조지 섬의 세종기지에서 도둑갈매기를 처음 맞닥뜨린 순간을 17일 이렇게 기억했다. 도착 첫날 무방비로 나갔다가 머리를 얻어맞고 기지로 도망쳤다. 현장조사로 뼈가 굵은 ‘새 박사’에게는 치욕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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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최상위 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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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의 매’라는 별명이 있는 갈색도둑갈매기와 남극도둑갈매기는 남극 최상위 포식자로서 어린 펭귄이나 알, 심지어 약한 동족도 잡아먹는다. 번식기에 둥지에 접근하는 누구라도 맹렬하게 공격한다.

“사실 연구원들이 하도 겁을 줘 사전에 오토바이 헬멧과 용접용 장갑까지 준비했어요. 그런데 이런 우스꽝스러운 복장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요.”

중무장한 김 박사에게 도둑갈매기가 돌진해 부닥치자 ‘띵’하는 진동이 머리를 울렸고, 이렇게 몇 번 부닥친 새는 다시 달려들지 못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 남극에는 다른 나라의 기지도 있고 진작부터 도둑갈매기를 연구하던 조류학자도 여럿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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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기지의 조류학자 마쿠스 리츠가 세종기지를 찾았다. 그의 배낭에는 면봉처럼 생긴 기다란 물체가 삐죽 솟아 있었다. “도둑갈매기를 때려주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물건인 줄 알았는데, 반대로 새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였다.” 도둑갈매기는 몸에서 튀어나온 가장 끝부분을 공격한다. 또 단단한 물체에 부닥치면 새가 다칠 우려가 있다. ‘가짜 머리’는 사람과 새 모두가 다치지 않으려는 묘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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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기지도 알아주는 ‘스쿠아 김’


대개 종이를 뭉쳐 푹신하게 만든 뒤 테이프를 감아 만든다. 김 박사는 스티로폼을 이용해 멋진 허수아비 머리를 만들어 썼다. 그러나 2년 뒤 ‘가짜 머리’를 더는 쓰지 않게 됐다. 도둑갈매기가 워낙 쪼아대 망가지기도 했지만, 김 박사가 이 새를 손으로 포획하는 요령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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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하기 위해 덮치는 도둑갈매기의 다리와 날개를 잽싸게 붙잡아 제압한 뒤 발에 연구용 가락지를 끼우지요. 머리를 얻어맞는 일엔 이골이 나 이젠 아픈지도 몰라요.” 그의 이런 조사법은 남극에서 꽤 유명해 외국 연구자들로부터 ‘스쿠아(도둑갈매기의 영어 명칭) 김’이란 애칭을 얻기도 했다.

도둑갈매기는 사납기만 한 새는 아니다. 이 새는 알의 크기를 측정하고 기록하던 볼펜과 장갑, 모자 등을 틈만 나면 물어갔다. “직접 공격이 안 먹히자 소지품을 물어다 버려 침입자를 둥지로부터 떠나도록 유도하는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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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목장’ 운영하는 도둑갈매기


더 교묘한 행동도 한다. 도둑갈매기들 가운데 우월한 쌍은 펭귄의 집단 서식지를 나누어 자신만의 사냥터로 삼는다. 김 박사는 이를 ‘도둑갈매기의 펭귄 목장’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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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갈매기는 자신의 영역 안 펭귄 무리를 지켜보다 부모가 자리를 비우거나 한눈을 파는 둥지를 습격한다. 언제나 먹이를 구할 수 있는 편한 사냥터를 확보한 셈이다. 물론 어미 펭귄은 격렬하게 저항하고, 그럴 땐 도둑갈매기도 싹싹하게 둥지 공격을 포기한다. 어차피 손쉬운 사냥감은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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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도 이런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는 것은 아니다. 도둑갈매기는 자신의 영역을 노리는 다른 포식자에게 결사적인 공격을 퍼부어 쫓아낸다. “어찌 보면 인간 사회의 조직폭력배 비슷해요. 하지만 남극이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이죠. 이런 행동을 킹조지 섬뿐 아니라 이번에 조사하는 남극 본토의 장보고 기지 주변에서도 관찰했습니다.”

그는 킹조지 섬에서 그가 조사하고 관찰한 도둑갈매기를 비롯해, 남방큰재갈매기, 칼집부리물떼새, 임금펭귄, 남극물개, 표범물개, 남방코끼리물범, 남극크릴 등 다양한 동물에 얽힌 이야기를 모아 ‘사소하지만 중요한 남극동물의 사생활-킹조지 섬 편’(지오북)을 최근 펴냈다.

김 박사는 이런 연구를 통해 남극동물의 생존방식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특이하다고 생각되었던 행동, 생태, 생리적인 특성들은 표출되는 방식이 좀 다를 뿐 인간의 그것과 본질이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생물 종의 이미지를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도 생각하게 됩니다.”

글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사진 지오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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