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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ESC] ‘느린 우체통’에 편지를!···사람을 아끼는 아날로그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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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편지 & 우체국

디지털 시대에 우체국은 아날로그의 상징

‘우체국 어르신 돌봄 서비스’ 등 도입

‘느린 우체통’·‘틴틴우체국’·‘작은 대학’ 등

변신 꾀하는 우체국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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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쓴다는 건 본래 기다리는 행위였다. 손으로 글씨를 쓰고 봉투에 풀칠한 뒤 우표를 붙여 보내고 나면 기다리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답장을 받으려면 적어도 며칠, 길게는 몇 달씩 기다려야 했다. 먹고 자고 싸다가도 그야말로 목이 빠진다. ‘읽씹’(읽었지만 답하지 않음)이나 ‘일씹’(숫자 ‘1’을 남겨둔 채 읽지 않음)을 당할까 봐 분초 단위로 열어보는 카톡 창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기다림이다.

지난 6년동안 거리의 빨간 우체통은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우편물도 2002년 55억통에서 2015년 30억통으로 줄었다. 새삼스럽진 않다.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 대신 카톡과 이모티콘을 보내는 시대가 아닌가. 우체국의 존폐를 논하는 어두운 전망도 나온다. 정말로 우체국의 입지는 위태로운가. 인공지능(AI)이 인간을 대체한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21세기에 우체국과 집배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집배원이요? 매주 수요일에 오죠. 노인네가 아프진 않나 죽진 않았나, 들여다보는 거지.” 마른기침이 잦은 김종하(77)씨가 말했다. 강원도 정선에 산 지 15년째인 그는 가족이 없다. 두세 시간마다 막걸리로 배를 채우고, 끼니라고 해봤자 하루에 한 번 라면으로 때우는 게 전부다. 그를 찾는 손님은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집배원뿐이다. 소소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 집배원은 그가 타준 커피믹스를 사양하지 않는다. 때로는 집배원이 사진을 찍어가기도 하는데, 김씨의 근황을 읍사무소나 가족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이른바 ‘우체국 어르신 돌봄 서비스’의 일환이다.

지난해 우정사업본부는 ‘우체국 어르신 돌봄 서비스’ 시범운영에 들어갔다. 부모가 65살 이상인 자녀가 전국 우체국에 신청 접수하면 된다. 이용요금은 월 4000원. 집배원은 주 1회 대상자를 방문해 건강상태 등을 점검하고 자녀에게 인증사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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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론이 강원도 영월군 봉래산 정상에 우편물을 배송하는 데 성공했다지만, 드론은 우편물 배달과 ‘우체국 어르신 돌봄 서비스’를 동시에 하는 집배원의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 역사학자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최신 저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인공지능의 장점이자 한계로 ‘전문화’를 꼽았다. 하라리에 따르면 인공지능은 한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데 능숙할 뿐, 여러 일을 동시에 하는 건 불가능하다. 인공지능이 수술하는 의사를 대체할 순 있어도, 주삿바늘을 꽂고 기저귀를 갈면서 환자의 감정까지 다독이는 간호사를 대신하긴 힘들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아날로그의 가치. 그것이 여전하다고 해서 우체국이 세상 변화에 무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체국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변신 중이다. 업무 효율성과 집배원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올해 1인용 전기차 5000대를 배치하기로 했으며, 지난해 문을 연 ‘틴틴우체국’은 반응이 뜨겁다. 서울중앙우체국과 부산 연제우체국 등 전국 10개 지점에서 운영하는 ‘틴틴우체국’은 로봇과 코딩, 스리디(3D) 프린팅 같은 4차 산업기술을 체험할 수 있어 방문객들로 북적인다.

코딩과 앱 만들기, 컴퓨터와 스마트폰 활용법을 무료로 가르쳐주는 ‘작은 대학’도 인기다. ‘작은 대학’이 지역 노인과 다문화가정 등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은 우체국이 디지털시대 생존법을 모색하면서도 공공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역발상’에서 비롯된 시도도 있다. 편지를 넣으면 1년 뒤에야 배달해주는 ‘느린 우체통’이다. 전국 각 지역에 2백여개가 있는데, 빨간 우체통이 사라진 자리를 한층 더 아날로그적인 것으로 메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느린 우체통’은 2009년 5월 영종대교에 처음 설치된 이후 이용자가 꾸준히 늘어 현재 전국 187만통이 생겼다.

지난 14일, 주말 나들이 삼아 들른 서울 북악스카이웨이에도 빨간색과 초록색, 민트색의 ‘느린 우체통’이 있었다. 1년 후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상큼하고 귀여운 엽서에 새해 소망과 다짐을 써보았다. 올해도 삶의 무게를 잘 견디길 바라면서, 곁에 있는 이들을 어떤 이유에서건 그리워하게 되지 않길 바라면서. 이병률 시인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한다면, 당신도 이번 주말 가까운 ‘느린 우체통’을 찾아 ‘2019년 맞이하기’를 해보는 건 어떨지.

‘편지를 쓰는 시대에 살았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에요. 편지가 생활의 일부였다는 건 정신이 건강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살았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사람을 아꼈던 시대이기도 하고요.’ (이병률 대화집 <안으로 멀리뛰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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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연 객원기자 nalotos@gmail.com



우체국 편지쓰기는 문학이나 영화의 오래된 주제다. 예전에는 편지 같은 우편물을 접수하고 배달하는 곳이 우체국이었다. 스마트폰과 에스엔에스(SNS)가 보편화하면서 우편물이 급감하자 요즘은 택배와 예금?보험 판매가 우체국의 주요 수입원이다. 우체국은 전국 2천여개가 있으며, 우편 업무만 취급하는 우편취급국도 있다. 우편 사업의 적자를 만회하려고 ‘알뜰폰’ 판매나 건물임대, 인터넷쇼핑몰 같은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4차 산업기술을 체험할 수 있는 우체국을 신설하거나 1인용 전기차를 도입하는 등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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