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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1919 한겨레] 총독부마저 비판한 친일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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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 뒤 귀족 칭호에 은사금까지 두둑히 챙겨

쌀값 폭등에 빈민구제 소홀하자 매일신보 비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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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쌀값 폭등으로 조선인들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운데 일제로부터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파들이 총독부가 권한 빈민구제 활동에도 소홀해 작년 <매일신보>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은 일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해당 사설을 쓴 매일신보 기자가 친일파들의 항의로 퇴사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참에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귀족이 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친일파들과 절개를 지킨 지사들을 고하니 오늘의 경계로 삼아 마땅하리.

<매일신보>는 작년 8월20일자 사설 ‘귀족부호의 빈민구제에 대하여’를 통해 빈민구제에 동참하지 않은 조선귀족들에 대해 ‘인민의 모범’을 보이지 않았다며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총독부는 조선귀족들에게 기부금 등 자선사업에 적극 나서기를 주문해 왔는데 일왕으로부터 은사금과 함께 귀족 작위까지 받은 친일파들이 이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위를 향한 충성스러운 순종’과 ‘아래를 향한 모범’이라는 일본 제국의 방침을 거스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총독부 기관지의 입을 빌린 간접적 경고였지만 친일 귀족들의 반발은 거셌다. 당장 총독부는 해당 사설을 집필한 선우일(鮮于日)을 퇴사시키는 것으로 진화에 나섰다.

총독부가 한발 물러선 모양새를 취한 건 식민통치의 안정화를 위해 친일파들의 존재가 긴요했기 때문이었다. 1894년부터 이뤄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를 철폐한 일제는 강점 직후 새로운 신분제를 만들었다. 이로써 경술년(1910) 10월7일 76명의 조선인들이 일왕에게 작위를 수여받고 ‘조선귀족’이 됐다. 구대한제국 지배계급에 대한 회유정책으로 탄생한 조선귀족은 왕족과 고관대작으로 나뉘었다. 이왕(순종)가의 종친과 척족(성이 다른 일가)의 경우 2~3등급인 후작·백작을, 대한제국의 정일품·종일품 등 고위 대신들에게는 4~5등급인 자작·남작이 수여되었다. 이에 따라 철종의 부마(사위)였던 대표적인 친일파 박영효와 순종의 장인 윤택영, 왕족인 이재각·이재완·이해승·이해창이 후작을 받았다.

‘합방에 기여한 공로’도 빼놓을 수 없는 기준이었다. ‘을사늑약’을 주도한 ‘을사오적’ 중 이지용(당시 내부대신)과 이완용(학부대신)은 백작을 받았다. 당시 외부대신이었던 박제순과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에게는 자작이 수여됐다. 경술년 강제병합에 앞장선 임선준, 고영희, 이병무, 조중응, 송병준 등도 그 공을 인정받아 자작이 되었다. 1등급인 공작은 없었는데 이는 일본 귀족과의 차별성 때문이었다.

이들 귀족은 일왕으로부터 국채증권으로 된 은사금도 받았다. 나라는 망했는데 친일파들은 그 대가로 재산이 불어난 것이다. 가장 많은 50만4천엔(2010년 가치 100억8천만원)을 받은 것은 윤택영이었다. 박영효는 28만엔(56억원)을 받았고 을사오적 중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완용에게는 15만엔(30억원)이 지급됐다.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친일파 송병준도 10만엔(20억원)을 챙기는 등 총 452만9천엔(906억원)의 은사금이 하사됐다.

친일파에게 명예와 부귀는 주어졌지만 권력에선 철저히 소외되었다. 강점 직후 총독부는 중추원이라는 자문기구를 만들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조선귀족들이 소일하도록 했다. 하지만 의장은 총독부의 정무총감이 맡도록 해 여기서도 친일파들은 들러리에 불과하였다.

한편, 모두가 조선귀족이 되길 자처한 것은 아니었다. 을사오적 처형 상소를 올렸던 문신 김석진은 작위를 수치로 여겨 자결하였다. 대원군의 둘째 사위인 조정구도 자결을 시도하였고, 의친왕의 장인 김사준은 반일운동으로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대한제국의 관료들이었던 윤용구, 한규설, 민영달, 홍순형, 조경호도 작위를 반납하였다.

오승훈 기자



△참고문헌

-심재욱, ‘1910년대 ‘조선귀족’의 실태’(사학연구·2004)

-임종국, <실록 친일파>(돌베개·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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