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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임신만큼 중요한 피임, 언제쯤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까? [일상톡톡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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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게 돼서 유해한 게 아닌 알지 못해 위험한 '피임'

원치 않는 임신은 여성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습니다. 학업이나 직장을 그만둬야 할 수 있으며, 불안·우울증 등으로 폭음·흡연에 빠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인데요. 최악의 경우 낙태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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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국내에서는 연 100만여 건의 낙태 수술이 이뤄지는데요. 그만큼 희망하지 않는 시기에 태어난 아이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문가들은 계획적인 임신을 위해 필요한 것은 피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피임 실천율은 34%에 그치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피임법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요.

부부가 원하는 시기에 소중한 아이를 낳기 위해서라도 올바른 방식으로 피임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원치않는 임신 방지, 계획적인 임신 위해 피임 필수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대로 된 피임법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서울 도심 버스와 지하철 역사 등에도 피임 관련 안내 혹은 광고를 찾아보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찬반 논란이 적지 않기 때문인데요. 그렇다보니 실제 광고 집행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계획적인 피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있음에도 피임 광고가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업계 관계자들은 피임 광고가 청소년 보호와 선도를 저해한다는 민원과 우려 때문에 옥외나 인터넷에서 광고 집행이 불가능했던 경험이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콘돔과 피임약 광고가 청소년에게 유해한 영향을 미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요. 일생의 계획만큼이나 중요한 피임에 대한 광고가 어떤 이유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걸까요.

◆성관계 경험 있는 청소년, 피임은 절반만 실천…교육은 갈수록 뒷전

질병관리본부의 제12차(2016년) 청소년건강행태온라인조사에 따르면, 성관계 경험이 있는 국내 중.고등학생 2287명의 피임 실천율은 남학생 52%, 여학생 51.8%로 절반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조한 피임 실천은 원치 않는 임신과 불법 인공임신중절로 이어질 수 있는데요. 아직 몸과 마음이 미성숙한 청소년기에는 더더욱 피임에 대한 정확하고 실질적인 교육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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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국내 현실은 그렇지 못한데요. 최근 12개월 동안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은 학생은 10명 중 7명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고등학생(66.2%)이 중학생(78.7%) 보다 낮은 것으로 조사됐는데요. 학년이 증가함에 따라 눈높이에 맞는 피임 교육이 수반되기 보다는 오히려 성에 대한 배움의 기회 자체가 제한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 세대, 피임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 벗고 현실 직시해야

이러한 성교육 부족 실태의 원인은 부모 세대 인식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성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터놓고 말하지 못한 채 자라온 부모 세대가 자녀의 성생활을 인정하고, 피임법 등과 같은 현실적인 성교육을 원활하게 하는 건 여의치 않은데요.

청소년 성생활에 대한 부모 세대의 보수적 인식은 피임법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하는 것이 오히려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편견이 되어 돌아오기도 합니다.

작년 이 무렵 학교 내 콘돔 자판기 배치를 놓고 이를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습니다. 콘돔 자판기를 설치할 경우 되레 청소년의 무분별한 성관계를 조장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는데요. 이는 청소년 피임권 보장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대립하며 한동안 갑론을박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청소년의 경구피임약 복용을 매우 위험한 행위로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발간한 피임제 상담 매뉴얼에 따르면, 성경험이 있는 청소년기 여성에서 사전피임제 사용이 생식기계 발달과 성장을 손상시킨다는 근거는 없으며, 사전피임제 복용으로 인해 이차성 무월경(생리가 있었으나 그 후에 생리가 없는 경우)이 유발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실제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여성 70% 이상은 20세 미만의 나이에 경구피임약 복용을 시작한 것으로 보고되었는데요.

국내 청소년의 성관계 시작 연령은 평균 13.1세지만, 피임법에 대한 교육과 도구에 대한 접근성은 여전히 상당 부분 차단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청소년기 피임 필요성을 온전히 인정하며 콘돔과 함께 피임 성공률이 높은 다양한 피임법을 권장하는 선진국과 달리, 대한민국 기성세대는 청소년에게 피임이 필요한 상황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피임 대하는 올바른 자세, 보다 현실적인 성교육 인식 전환 필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청소년 건강행태 온라인조사' 결과를 분석한 연구를 수행한 이동윤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성경험이 있는 우리나라의 청소년 10명 중 1명이 임신을 경험한다"며 "임신을 경험한 청소년 10명 중 7명이 인공임신중절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많은 청소년들이 원치 않는 임신과 이에 따른 인공임신중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며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거부하는 방법부터 다양한 피임법의 종류와 효과 및 사용 방법을 아우르는 구체적인 내용의 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랑부터 피임까지 모든 게 다 궁금한 청소년도, 아직은 피임이 어려운 성인도 당당하게 알 권리와 자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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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한 관계자는 "피임법은 알게 돼서 유해한 것이 아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며 "알고 있는 것을 당당히 말하지 못하거나 알고 싶은 것을 떳떳하게 물어보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청소년의 성적 자유를 인정하면서 그에 수반되는 책임의 중요성을 함께 교육하기 위해 피임을 양지로 옮겨와 더욱 적극적인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청소년이 피임법에 노출되는 것 이상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제대로 된 피임 교육 부재와 우리 사회에 안정적으로 자리잡지 못한 피임에 대한 인식이 아닐까요?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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