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8 (목)

감시의 눈 없는 라커룸, 지도자가 지배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빙상장은 다른 종목과는 달리 라커룸 안에도 별도공간 더 있어 지도자들은 마음대로 들락날락

훈련 이유로 남으라고 해놓고 폐쇄적 공간서 폭행·성범죄 "전근대적 관리시스템 바꿔야"

2005년부터 2008년까지 태릉선수촌장을 지낸 이에리사(65) 현 '이에리사 휴먼스포츠' 대표는 처음 촌장을 맡은 뒤 선수촌 숙소를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5층짜리 숙소에 1~3층은 남자, 3~5층은 여자 대표 선수들이 쓰고 있었다. 체육계가 성폭행 예방에 얼마나 둔감했는지 알 수 있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이에리사씨는 "유명 국가대표 여자 선수들을 앞세워 당시 선수촌 관할 기구이던 문화재청까지 직접 찾아간 끝에 여자 숙소를 별도로 만들었다"고 했다.

2017년 2단계 공사까지 완료한 진천선수촌은 태릉과는 달리 처음부터 남녀 숙소를 구분했고, 각 숙소에 전문위원이 상주해 출입을 통제한다. 하지만 이 역시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범죄 사각지대는 라커룸

여자 쇼트트랙 간판스타였던 심석희는 지난달 17일 경찰에 제출한 고소장에서 "2014년부터 2018년 평창올림픽 개막 두 달 전까지 전(前) 조재범 대표팀 코치에게 태릉선수촌, 진천선수촌, 한체대 빙상장 등에서 여러 차례 성폭행과 강제 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여준형 젊은빙상인연대 대표는 다른 선수의 추가 성폭행 피해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밝히면서 "5~6건의 선수들이 성폭력을 포함해 폭행당한 장소가 대부분 빙상장 내 라커룸이나 탈의실, 작은 창고방이었다"고 했다.

쇼트트랙, 피겨, 아이스하키 대표 선수들이 번갈아 사용하는 빙상장은 다른 종목과는 달리 라커룸 안에도 샤워실 등 별도 공간이 하나 더 있다. 성범죄가 숙소가 아닌 라커룸에서 발생해도 감시할 방법이 없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런 폐쇄적인 곳에서 지도자들에겐 통행금지구역이 따로 없다. 동계 종목의 A감독은 "지도자가 훈련을 이유로 남으라고 하면 선수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관례"라며 "이 과정에서 폭행이나 성범죄를 저지를 경우 막을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는 "라커룸에서 속옷 차림으로 국내 선수들이 남녀 구분없이 옷 갈아입는 모습을 외국인 지도자와 선수들이 보고 기겁한 적도 있다"며 "선수촌 내 라커룸도 문제지만 외부 훈련 때 컨테이너에 임시로 마련된 라커룸에서는 선수촌보다 더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근대적 관리받는 첨단 시설

진천선수촌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각종 사고와 음주 사건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선수촌 내에서 지도자와 선수들은 오후 11시 선수촌에 복귀해야 한다. 진천선수촌은 외부와 동떨어져 있어 가끔 외출해서 밖에서 저녁식사나 술을 즐길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편의점에서 소주나 캔맨주를 사 들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국정감사 때 음주 문제가 지적을 당했지만 선수촌에선 여전히 술병들이 쌓여 나온다. 한 선수촌 관계자는 "각 종목 감독을 모아 두고 '국정감사 끝난 지 며칠 됐다고 술병이 나오냐, 해도 너무한다'고 하소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평균 연령이 27세 정도인 젊은 대표 선수들이 외부와 격리된 공간에서 오랫동안 합숙 훈련을 하는 것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이런데도 국가 관리 시설인 선수촌은 일반적인 사고 예방 시스템이 부족하다. 지난 2013년 선수촌 내 수영장 여성 라커룸 몰카 설치 사건 발생으로 홍역을 치렀지만, 여전히 수영장 내 풀에서 남녀 탈의실로 향하는 곳엔 CCTV가 없다. 이재근 선수촌장은 "선수들 사생활 보호 때문에 CCTV를 마음대로 설치하지 못한다"고 했다. 현 관리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제2, 제3의 (성)폭행 사건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천=정병선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