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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아무튼, 주말] 나는 평범한 사람… 그런데 '중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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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중 기자의 쇼타임] 탈북민 500명 구해 난민 인정 받은 '중국의 쉰들러' 투아이룽

'박해받았던 1200명 유대인의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 예루살렘에 묻힌 오스카 쉰들러(1908~1974)의 묘비명은 이렇다. 현대인은 그를 '세계의 의인(義人)'이자 '세기의 휴머니스트'라 칭송한다. 1944년 쉰들러는 아우슈비츠로 이송되는 유대인 1200명을 숨겼고,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며 7개월간 이들의 생명을 보호했다. 찬양 일색은 아니다. 일부 역사학자는 "쉰들러 리스트는 극장에만 존재한다"(데이비드 크로가)고 꼬집는다. 그가 처음엔 자신의 군수공장에서 강제노동을 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슈츠슈타펠(나치당 친위대)로부터 유대인 노동자들을 공급받고, 초창기에는 나치 독일에 협력한 부패 사업가였다는 사실을 비판한 것이다.

여기 '중국의 쉰들러'라 불리는 남자가 있다. 투아이룽(塗愛榮·55). 중국과 라오스의 접경지대에서 무역일을 하던 평범한 가장(家長)이 탈북자를 도운 첫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동남아 탈북 루트의 '미들맨(중간책)'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우리 북한인권 단체들이 의지하는 '믿을맨'이 됐다. 그의 도움으로 2004년부터 12년간 500여 명에 이르는 탈북자가 북을 출발해 라오스, 태국, 미얀마 등을 거쳐 남쪽으로 올 수 있었다. 중국 당국의 압박에 시달리던 지난 2016년 3월 투아이룽은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로부터 1000여 일만인 지난달 22일 법무부 산하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은 그에게 난민인정서와 함께 체류자격 'F-2(거주)'를 부여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29일 서울 방배동의 한 교회에서 그를 만났다. 160㎝에 약간 모자라는 키에, 전형적인 '옆집 아저씨'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입을 뗐다. "나는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려 했던 평범한 사람이다. 영웅도, 쉰들러도 아니다".

북한 사람인지도 모르고 브로커가 됐다

1963년 중국 장시(江西)성의 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집은 가난했고, 배움은 짧았다. 스물다섯이 되던 해에 더 좋은 직업을 찾아 중국과 라오스의 접경지대로 떠났다. "의약품과 야생동물, 가구 등을 사들여 판매하는 무역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탈북을 돕는 일은 어떻게 시작했나.

"일을 하면서 알게 된 한국인 사업가가 있다. 처음엔 '친척들을 라오스로 데려다 달라'고 했고, 국경 너머까지 안내하는 조건으로 돈을 받기로 했다. 라오스는 한 명당 500달러(약 56만원), 태국은 1000달러(약 112만원)씩 받았다."

―돈 때문에 브로커가 된 것인가.

"반은 맞다. 본업만으론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기 벅찼으니 관심을 가진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형편이 나아진 후에도 손을 뗄 수가 없었다. 탈북자들이 이미 나한테 왔을 땐 죽을 각오를 하고 온 것이니까.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목적지까지 인도해줬을 때의 그 표정들을 잊지 못한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고, 나 스스로도 성취감이 있었다. 중독성이 생겨 내 일처럼 도와주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이 나서기엔 위험한 일 같은데.

"가족과 지인들의 반대가 무척 심했다. 두 번이나 감옥에도 다녀왔다(중국 형법은 다른 사람이 국경을 넘도록 도운 경우 2년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007년 그는 한 차례 구금됐고, 2008년 에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다). 사실 처음에는 탈북민을 돕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한 번은 일행을 데리고 식당에 갔는데, 한 남자가 자기 앞에 있는 6인분의 쌀밥을 혼자 다 먹더라. '사람이 이렇게 많은 밥을 먹을 수도 있구나' 하고 놀랐다. 너무 오랫동안 굶어 그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북한 사람들이었다."

―가장 기억나는 순간은.

"2005년쯤 한 한국인 브로커가 중국 윈난(雲南)에서 라오스 국경까지 탈북자 다섯 명의 인도를 부탁했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 나가보니 일곱이나 와 있더라. 가족을 더 데리고 온 것이다. 탈북 과정에선 한 치 오차도 없어야 했는데 당황했다. 하는 수 없이 라오스로 데려갔는데, 남한 국적의 브로커가 '약속한 5명보다 더 데려왔으니 수고비는 줄 수 없고, 돈이 필요하면 나머지 둘의 여권과 지갑을 털어 마련하라'고 했다. 동족(同族)이라면서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럴 때 가장 섭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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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태국 방콕의 야시장에서 탈북자들을 한국 대사관에 인계하기 직전의 모습. / 천기원 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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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한국은 '약속의 땅'"

―한국행을 택한 이유는.

"2010년대 들어 공안 당국의 감시와 추적이 심해졌다. 사명감과 당국의 탄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 2012년 라오스 국적을 취득해 숨어들었다. 유엔난민기구(UNHCR)를 통해 태국이나 대만 같은 인접국으로 망명을 시도했는데 번번이 거절당했다. 2016년 라오스의 중국 대사관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면 잘 대우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동물적인 직감이 작용하더라. 당국이 은신처를 찾아내 습격하려 한다는 지인의 귀띔에 곧바로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은 다를 거라 생각했다. 나에게도 '약속의 땅'이 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실제로 '약속의 땅'이었나.

"입국 후 첫 난민신청에서 거절당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탈북자를 도운 사람이 망명한 사례가 없고, 라오스에서 평온한 생활을 한 만큼 박해와 공포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법원의 논리였다. 불인정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고, 두 차례에 걸쳐 결국 재판에 이겼다. 난민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걸로 알아 걱정스럽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쁘다."

―한국생활 적응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작년 겨울 교회에서 제공한 숙소에 머무르며 구로동과 가리봉동의 건설 현장에서 하루 10만원 내외의 일당을 받고 막일을 했다. 돈을 벌어 중국에 있는 가족들을 데리고 와야 했으니까. 아침 4시에 일어나 저녁 7시에 퇴근하는 노동의 반복이었다. 숙소에 오면 어둠과 적막함만이 나를 맞았다. 외로워서 '차라리 고향(중국)으로 돌아가 옥살이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또 중국 남방 사람이라 따뜻한 곳에서만 살았는데 너무 추웠다. 지병인 당뇨도 더 심해졌고. 중국에 있는 딸과 매일같이 통화했는데, 그때의 행복감 하나로 버텼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들과도 재회했다.

"결혼은 두 번 했다. 처음은 중국에서 했다가 그만뒀고, 두 번째는 라오스에서였다. 그래서 식구가 많다(웃음). 나를 포함해 여섯 식구가 모두 한국에 있다. 열심히 돈을 벌었고, 1년 반 만인 지난해 6월 중국의 아이들과 라오스의 처자식을 모두 데리고 왔다. 제주도에 체류하며 난민 지위 인정을 받기 위해 재판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감사하게도 교회와 시민단체 등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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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여섯 식구가 한국에서 모두 모였다. 2년 만의 재회였다. / 천기원 목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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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 사회는 무엇이 다른가.

"중국이 아직 아날로그에 머물고 있다면, 한국 사람들은 확실히 디지털 시대를 사는 것 같다. 모든 게 스마트하고, 효율적으로 굴러간다. 공기도 더 맑고. 물론 중국이 더 좋은 점도 있다. 말이 통하고 유사시 문제 해결도 수월하지 않겠나. 이제는 영영 돌아갈 순 없게 됐지만 고향이 그리운 것은 사실이다."

―한국에 있으면서 '최고의 순간'을 꼽아본다면.

"여기 와서 내가 탈북을 도왔던 이들 여럿과 재회했다. 나를 '따거(큰형님)'라 부르며 반갑게 맞아준 이 사람들이 내 최고의 한국 친구들이다. 10대 소녀였던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해 애기까지 낳아 엄마가 되어 있더라. 이젠 내가 도움을 받는다. 난민 심사에서 떨어져 불복 소송을 할 때에는 법원에 탄원서를 써줬고, 외교부에 나가 나에게 도움받은 사실을 증언해줬다. 가끔 우리끼리 만나 중국 음식을 시켜놓고 추억을 공유한다. '시장에서 망고스틴과 불량식품을 잔뜩 사줬던 것을 잊지 못한다'는 뒤늦은 감사의 말부터, '산속에서 너무 많이 걸어 다리가 부서질 것 같았다'는 투정까지. 대부분이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즐겁다. 내 인생에서 가장 뿌듯한 순간 중 하나다."

"'중국의 쉰들러'란 표현 부담스러워"

그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해줬다'던 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유를 찾아 사선(死線)을 넘은 3만여 명의 탈북자는 요즘 "세월이 수상하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10월 통일부는 판문점 우리 구역에서 열린 남북 회담을 취재하려던 탈북민 기자의 취재를 불허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엔 경북 하나원(탈북민 교육기관)의 컴퓨터가 털려 1000여 명의 신상 정보가 유출됐다. 최고위급 탈북자 중 한 명인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은 주기적으로 살해 협박에 시달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0월 "문재인 정부는 인권을 말살하는 북한 정부를 암묵적으로 옹호 또는 승인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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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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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정부의 탈북자 대우는 어떻게 보는지.

"나는 가방끈이 짧아 복잡한 건 잘 모른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 일을 한 지난 20년 동안 가만히 살펴보니 북한에 적대적인 대통령들은 탈북자에게 잘해주고 그 반대 경우는 박해하는 것이 보이더라. 나라에서 일관성 있는 틀을 만들어 놓지 않고, 어느 대통령이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서 정책이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그래도 자국민인데 이해가 되지 않고, 어이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탈북민에 대한 보통 중국 사람들의 인식은 어떻나.

"그런 개념 자체가 없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북한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도 못하는 게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북한은 개혁·개방을 하지 않는 나라, 중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굶어 죽는 공산국가다. 왜 탈북자가 생기는지 이해가 쉽지 않다. 내가 상당히 특수한 경우다."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는지.

"'중국의 쉰들러'란 표현은 부담스럽다. 나는 대단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 사람이니까 당연히 후회되는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주변에 무역업을 계속했던 친구들은 많게는 하루에 2000달러 정도를 번다. 아주 부자가 됐고, 그 가족들은 호강하고 있다. 나도 '그냥 하던 일을 계속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인생에 돈이 전부가 아니고, 뿌듯함이 있었으니 그걸로 됐다. 나는 내 양심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고, 어렵고 힘든 이들을 도와 그들이 말하는 '천국(대한민국)'으로 보내는 메신저 역할을 했으니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덕(德)을 쌓았으니 미래엔 내 삶도 더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웃음)."

'호랑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아무 말이 없던 아저씨.' 투씨의 도움을 받아 이 땅에 정착한 탈북자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가 대답했다. "100만 가지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누구는 인신매매를 당해 성적으로 착취당했고, 누구는 식당에서 15시간을 넘게 일해도 돈을 못 받았다. 애꿎은 질문을 해서 그들이 숨기고 싶은 얘기를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듣는 나도 고통스러워졌으니까."

말하는 그는 담담했고, 듣는 나는 뜨거워졌다.

[김은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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