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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장애가 있든 없든, 우리는 모두 전문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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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비장애인 통합극단 ‘하이징스’ 이끄는 클레어 윌리엄스

경향신문

연극 연출가인 클레어 윌리엄스가 지난 9일 서울 정동에서 인터뷰하며 자신이 대표를 맡고 있는 영국 극단 ‘하이징스’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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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남과 다른 개성으로

장애 지닌 배우 캐스팅하면

진실한 연기에 관객 흥미도 커져

장애 지닌 배우 만나는 것을

당연시하는 세상 만드는 게 꿈”

오늘부터 연극 ‘프레드’ 공연


영화 <레인맨>에는 자폐증을 지닌 ‘레이먼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할리우드의 명배우로 손꼽히는 더스틴 호프먼이 그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받았다. <아이 엠 샘>이라는 영화도 비슷하다. 지적장애를 지닌 ‘샘’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이 배역을 맡았던 숀 펜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소름끼친다” “완벽하다” 등 두 배우의 연기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들이 잇달았다. 장애를 지닌 극중 인물을 비장애인 배우가 연기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상황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말아톤>의 주인공 ‘초원이’를 연기한 배우는 조승우였다. 연기력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고 그로 인해 배우는 많은 상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자폐를 지닌 배우가 초원이 역할을 맡았으면 어땠을까’라고 상상한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영국의 극단 ‘하이징스(Hijinx)’의 대표이자 연출가인 클레어 윌리엄스는 “적어도 2030년에는 장애를 지닌 배우가 아카데미상 시상대에 오르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라고 했다. 1981년 영국 웨일스에서 창단된 하이징스는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어울린 ‘통합극단’(Inclusive theater)이다. 윌리엄스는 “우리 극단에는 장애를 지닌 배우와 그렇지 않은 배우들의 비율이 반반”이라면서 “급여와 대우에서 모두 동등하다. 장애가 있든 없든, 우리는 모두 전문 배우들”이라고 강조했다. 극단 하이징스와 함께 첫 내한, 11일부터 13일까지 대학로 이음센터에서 연극 <프레드>(원제 Meet Fred)를 선보이는 그를 지난 9일 서울 정동에서 만났다.

“우리 극단의 미션은 분명합니다. 연극 무대에서든, 스크린에서든 장애를 지닌 배우를 만나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죠. 장애를 지닌 역할을 장애가 없는 배우가 연기하는 것은 백인이 흑인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오르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우리 극단 배우들은 장애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으로, 남과 다른 개성으로 받아들이죠. 저는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를 만드는 제작사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위’이기 때문에 ‘장애인 배우’를 고용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수긍할 수 없어요.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장애를 지닌 배우를 캐스팅하면 보다 진실한 연기가 가능하고, 더불어 작품의 예술성도 높아진다는 사실, 이에 따라 관객의 흥미도 훨씬 커진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윌리엄스는 “장애를 지닌 배우들에 대한 연민 어린 호평”도 거부했다. “작품 그 자체를 냉정하게 평가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는 태블릿PC를 꺼내더니 극단 배우들을 소개했다. 배우들이 자신이 누구이며 그간 어떤 작품에 출연했고, ‘나만의 장기’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동영상이었다. 특히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말은 “I am professional”이었다. 어떤 배우는 드럼을, 또 어떤 배우는 관악기를 멋들어지게 연주했다. ‘춤꾼’도 있었다. 윌리엄스는 “이 사람들이 우리 극단 배우들”이라며 자부심이 가득한 미소를 보냈다.

“하이징스의 대표를 맡은 것은 6년쯤 전입니다. 그런데 대표로 취임한 첫 주에 저를 온통 뒤흔들어놓는 경험을 했어요. 다운증후군과 자폐를 지닌 배우들에게 연기를 지도하다가, 그 뛰어난 연기력과 퍼포먼스에 감탄하고 만 것이죠. 그때부터 극단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그 전에는 웨일스 전역을 투어하면서 공연을 올리는 게 가장 중요했는데, 제가 취임한 다음부터는 배우들의 역량을 키워내는 프로그램이 더 중요해졌어요. 취임 첫해에 배우가 7명이었는데, 지금은 70명으로 늘었습니다.”

지난 6년간 하이징스의 명성도 높아졌다. 대표 겸 연출가의 전략은 영리했다. 그는 인지도가 높은 극단들과 협업하기 시작했다. 펀치 드렁크, 블라인드 서밋, 스파이몽키 등 영국의 유명 극단들과 공동 작업을 펼치면서 하이징스 배우들을 영국 전역과 에든버러 페스티벌 등에 소개했다. “우리는 웨일스 카디프의 작은 극단이었죠. 사람들은 우리를 잘 몰랐어요. 하지만 명망 있는 극단들과 협업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죠. ‘펀치 드렁크’와 같이하니까 관객들이 몰려왔어요. 물론 관객들에게도 신선한 경험이었죠. 장애를 지닌 전문 배우들의 공연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블라인드 서밋, 스파이몽키와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함께했던 공연들은 완전 매진을 기록했어요. 올해에는 웨일스 국립극단과의 협업이 예정돼 있죠.”

윌리엄스는 먼저 배우들의 역량을 충분히 배가하고, 극단의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하이징스는 현재 웨일스 곳곳에 장애를 지닌 배우들을 위한 5개의 연극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으며, 배우들을 여러 무대와 스크린에 진출시키는 에이전트까지 겸하고 있다. 이번 내한은 주한 영국문화원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연극 <프레드>는 사회적 편견과 싸우는 ‘당당한 헝겊인형’의 이야기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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