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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교회도 현실에 참여해야”... 민주화를 뒷받침한 정신적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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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김수환의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
한국일보

김수환 추기경. 목숨 다하도록 사랑에 타는 제물이 되고자 성직자가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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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사상은 종교다. 종교는 인식의 틀이자 믿음의 체계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제공하고 그 관계를 지속시키는 가치를 부여하는 게 바로 종교다. 이 지상에 존재해온 종교들 가운데 영향력과 합리성을 갖춘 것들을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세계 종교’라고 명명했다. 기독교, 불교, 유교가 대표적인 세계종교들이다.

종교가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은 넓고 깊었다. 전통사회에서 불교와 유교는 철학사상인 동시에 지배 이념이었다. 기독교는 조선 후기에 들어온 서양 종교였다. 천주교는 잇단 박해에도 사람들 마음속에 굳게 뿌리를 내렸고, 개신교 또한 개인 생활에서 사회 제도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1945년 광복 이후 가장 주목할 기독교인을 꼽으라면 나는 함석헌과 김수환을 들고 싶다. 함석헌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을 이뤘다. 김수환 역시 민주화 운동에 크게 기여한 동시에 ‘국민적 멘토’의 역할을 맡았다.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데 앞장섰고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이가 바로 김수환이었다.

◇ 김수환의 삶과 신앙

김수환은 192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본 조치대학, 가톨릭대학,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공부했다. 1951년 가톨릭 사제를, 1966년 주교를 서품 받았고, 1968년 대주교로 승품해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했다. 1969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됐다.

이후 그의 활동은 눈부셨다. 그는 감성과 이성을 포괄한 영성의 가치를 중시했다. 무엇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소중히 여기는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했고, 권력의 횡포에 맞서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적극 계몽하는 정의를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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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어머니와 사진을 찍은 김수환 추기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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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 김수환 추기경 평전’을 쓴 문학평론가 구중서는 김수환을 ‘한국 민주화의 결정적 주역’이라고 평가한다. 1971년 성탄절 자정 미사를 통해 그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초법적 독주를 비판했고, 1987년 6월 10일 명동성당에 들어온 학생들을 안기부와 경찰이 연행하려 하자 ‘나를 밟고 넘어가라’며 이를 저지했다. 두 번째 일은 6월 항쟁의 결정적 순간들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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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의 피해자 박종철의 어머니와 만나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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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의 영향력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다. 1990년 주간지 시사저널 창간호는 대학 교수들을 상대로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는 여론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당시 김수환은 대통령 노태우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정치인 김대중과 경제인 정주영이 그의 뒤를 이었다. 이처럼 김수환은 사랑과 정의의 종교적 지도자로 많은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시민사회의 도덕적 구심을 대표했다.

◇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김수환이 남긴 글과 강론은 2001년 팔순과 사제 서품 50주년을 기념해 ‘김수환 추기경 전집’ 전18권으로 나왔다. 그가 남긴 말과 글을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엮은 책이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이다. 2008년에는 이 책의 개정 2판이 두 권으로 나왔다. 김수환의 삶, 기도와 시, 그리고 신앙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저작이다.

김수환은 종교인이자 종교사상가다. 그에게 삶과 믿음, 인식과 신앙, 사유와 실천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앞서 말했듯 그는 사랑과 정의의 사상가였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통찰하고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믿음의 사상가, 교회의 역할을 중시하고 현실에서 정의를 구현하려 했던 실천의 사상가가 바로 그였다.

사회학자인 내가 보기에 김수환은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사상가다. 이 책의 간행사에서 추기경이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은 김수환이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를 모색했다고 말한다.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가 김수환이 추구한 삶이자 사상이었다는 회고는 매우 적절한 평가다.

김수환이 다른 정의의 사상가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사회적 정의를 개인적 사랑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현세를 무엇으로 바꿀 수 있습니까? (...) 물리적인 힘으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 인간 세상을 인간다운 세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정신적 가치인 것입니다. 희망, 정의, 사랑, 자유 등입니다. 특히 인간의 사악한 마음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항구한 사랑, 조건 없는 사랑,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 앞에서 비로소 마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변해야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어야 행동이 이뤄지는 것은 인간 본래의 특징이다. 이러한 마음의 진정한 주인이 바로 그리스도가 가르친 사랑에 있다는 것을 김수환은 역설한다.

2009년 김수환이 선종한 다음 우리 사회가 정신적 주인을 잃었다는 느낌을 가진 이는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선종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40만의 시민 행렬은 그가 우리 사회에 드리운 정신적 영향의 그늘을 새삼 돌아보게 했다. 어떤 이들은 말년에 그가 남긴 정치적 발언을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과 사상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평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그의 묘비명이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는 성경 ‘시편’에 나오는 구절이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는 그의 추기경 문장(紋章)에 적힌 말이다. 그는 말한다.

“나의 표어인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도 실은 성서에서 따온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당신의 몸과 피, 당신의 전부를 제자뿐 아니라, 세상 시작부터 마침에 이르는 인류 전체를 위한 구속(救贖)의 제물, 생명의 떡으로 내놓으며 하신 말씀에서 비롯됐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내 삶을 남김없이 고스란히 인간 구제를 위해 바치는 목자, 목숨 다하도록 사랑에 타는 제물 되고자 나는 이 말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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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서울 목동의 무허가촌 봉사활동을 벌이던 시절의 김수환 추기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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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양을, 삶의 의미를 찾는 이를 인도하는 이가 목자다. 기독교에선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목자다. 우리와 모든 이를 위한 우리 시대 또 한 사람의 목자가 다름 아닌 김수환 스테파노였다.

◇ ‘동도’와 ‘서도’의 미래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 가톨릭을 자생적으로 받아들인 드문 국가다. 목숨을 앗아간 모진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도들은 신앙의 씨앗을 뿌렸다. 이 과정에서 내 시선을 끈 이들은 실학자 정약용과 그의 셋째 형인 정약종이었다.

젊은 시절 정약용과 정약종은 천주교를 배우고 받아들였다. 신해박해(1791) 이후 정약용은 천주교로부터 멀어진 반면, 정약종은 신앙생활에 더욱 정진했다. 정약종은 천주교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써서 보급했고,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인 그는 신유박해(1801) 때 순교했다. 1984년 아내(유조이)와 둘째 아들(하상), 딸(정혜)이 시성(諡聖)된 데 이어 그는 2014년 첫째 아들(철상)과 함께 시복(諡福)됐다.

김수환은 정하상 등의 시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84년 한국 성인 대축일 미사에서 그는 말한 바 있다. “그분들은 의인들이면서도 벌을 받았고, 재산과 생명,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 그대로 순교하심으로써 참 생명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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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적 시각에서 정약용과 정약종의 삶은 동양의 마음과 서양의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당시 천주교는 ‘서학’이라 불렸듯 서구적인 것을 상징했다. 천주교를 떠났던 정약용이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사상가였다면, 천주교를 지켰던 정약종은 ‘서도서기(西道西器)’의 종교인이었다.

우리 사회 미래에서 분명한 것은 제도의 변화 못지않게 마음의 변화 또한 중요하다는 점이다. 마음의 자각을 동반하지 않는 제도의 개혁은 결코 성공하기 어렵다. 마음과 제도는 함께 가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에서 출발을 이루는 것은 인간에 대해 ‘동도’와 ‘서도’가 공유하는 가르침이다. 인간은 본디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기에 타인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포용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윤리적 책무다. 이러한 책무를 실천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인간다운 미래를 열어갈 기본 조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이은숙의 ‘서간도 시종기’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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