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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비정규직·시간제·최저임금 미달…돌봄 일자리 취업 하시겠습니까? [행복사회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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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일자리 저평가 심각 / 2014년 최저임금 미달도 59% 달해 / 비정규직 77% 시간제 근로도 53% / ‘집안일의 연장’ 편견에 경시 풍조 / 전문가 “고난도 감정노동 요구 분야” / 정부, 재정절감위해 민간으로 이관 / 바우처제 시행 뒤 근로조건 나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집에 차려진 저녁상을 바라보며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라며 자본주의의 원리를 설명한다.

식탁에 오른 음식은 각 경제 주체가 생산한 재화와 노동력을 구매한 대가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렇게 거래되는 모든 행위를 집계해 국내총생산(GDP)을 산출한다.

스미스가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면 음식을 조리하는 노동력에도 대가를 지불했겠지만 집에서 일어난 이 노동에 그는 어떠한 가치를 매겼을까?

세계일보

스웨덴 여성학자 카트리네 마르살은 그의 저서 ‘잠깐 애덤 스미스씨∼’에서 “아무런 가치도 매기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스미스가 가사노동을 경제적 행위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한 가사와 육아(돌봄)를 사랑과 헌신, 모성의 영역으로 간주했다.

현대 사회는 돌봄 서비스에 비용을 지불한다. 1인 가구 증가, 여성의 사회진출 등으로 사회 구조가 변하고 아동과 노인에 대한 ‘돌봄 공백’이 발생하면서다. 하지만 그 일자리 대부분이 열악하다. 이전까지 각 가정에서 여성이 무급으로 했던 노동인 만큼 사회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돌봄 서비스는 정부가 민간에 돈을 지원하는 형태로 설계돼 임금과 고용안정성, 처우 등 무엇하나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열악한 일자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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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직 여성 임금…절반 이상 ‘최저임금 이하’

18일 통계청 ‘지역별 고용조사’에 따르면 사회복지서비스업 종사자는 2013년 72만1000명에서 2018년 103만9000명으로 증가했다. 돌봄 및 보건서비스 종사자는 같은 기간 30만6000명에서 43만명으로 늘었다. 이들의 절대 다수는 여성이다. 사회복지서비스업 종사자의 85.6%와 돌봄·보건서비스 종사자의 93.5%, 가사·육아도우미의 99.3%는 여성이다.

이들의 근로 환경은 다른 사회서비스업보다 훨씬 열악하다. 여성가족패널 5차(2014년) 자료에 따르면 돌봄 일자리에 종사하는 여성의 한 달 평균임금은 97만9000원으로 사회서비스업 여성 근로자 평균(177만2000원)의 절반에 그쳤다. 수입이 2014년 당시 월 최저임금이었던 108만8900원에 못 미치는 종사자가 58.9%에 달했다.

비정규직 비율(77.1%)도 사회서비스업 전체 여성(42.2%)보다 월등히 높고 절반 이상(53.2%)이 시간제로 근무했다. 사회서비스업 전체 여성의 시간제 비율은 22.3%다. 돌봄 종사자 10명 중 4명(39.7%)은 10인 미만의 영세사업장 소속이다.

돌봄 일자리의 성격을 한 줄로 요약하면 ‘여성, 비정규직, 시간제, 최저임금 미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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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급 노동’ 사회적 편견 여전…“전문 기술 필요”

국내외 수많은 전문가는 돌봄직이 ‘나쁜 일자리’가 된 건 여성들이 보상이나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집안에서 하던 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전문적인 경험과 숙련이 필요하지 않은 일자리로 여기는 사회적 편견 탓이 크다는 것이다.

권현지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1312개 사회복지서비스업 사업체의 돌봄직 종사자 1만9816명과 6064개 서비스업 사업체 종사자 14만8125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돌봄 노동자들은 교육수준과 경력 등 인적 자본을 통제하고도 여타의 서비스산업 종사자보다 30% 정도 임금 불이익을 받고 있었다”고 전했다. 권 교수는 “돌봄직에 단순히 여성 종사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돌봄에 필요한 직무와 기술 자체를 우리 사회가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돌봄은 더 이상 가족을 돌보는 사랑과 희생, 도덕적 차원의 일이 아니다. 낯선 타인을 잘 돌보려면 숙련된 기술과 지혜가 필요하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공동대표는 “돌봄노동은 고난도의 감정노동이 요구되는 매우 전문화된 기능”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아동과 노인 등 사회적 약자가 서비스 대상인 만큼 양질의 인력이 투입돼야 한다. 적절한 보상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권 교수는 “돌봄노동의 저임금 문제는 서비스 질과 직결된다”며 “저임금 구조가 고착되면 장기적으로 돌봄 인력이 부족해지고 저숙련 고령화 문제가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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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이 선생님과 수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 정책이 일자리 질 더 악화”

‘(인력을) 싸게, (제도 확산이) 빠르게, 이용자 중심으로’

그간 정부가 돌봄 일자리를 늘려온 외주화 정책의 핵심이다. 정부는 서비스를 제공할 업체에 보조금을 주거나 이용자에게 현금(바우처)을 지원하고 업체를 선택하게 했다. 경쟁을 통해 민간이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내세웠지만 속내는 재정 절감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민간은 공공부문보다 인건비 절감 등 쥐어짜기 운영 방식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가 2007년부터 장애인활동지원, 노인돌봄, 가사간병지원, 산모신생아 건강관리 서비스 등을 사회서비스 바우처 사업으로 시행하면서 돌봄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은 더 악화됐다. 바우처 사업은 정부가 소득 등 기준을 충족한 대상에게 현금(카드나 상품권)을 제공하면 이용자가 직접 업체를 고르는 복지제도다. 이용자의 ‘콜’이 있을 때만 일하는 시급제 노동이다. 종사자 처우보다 이용자 편의에 맞춰 사업이 추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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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정부가 2013년 바우처 사업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한 뒤 영세업체가 난립하며 열악한 조건에 내몰린 근로자가 많아졌다. 업체 규모가 작을수록 시설 운영비와 관리비 등에서 규모의 경제가 성립되지 않아 인건비 비중이 작아지기 때문이다. 2016년 사회서비스 공동대책위원회는 국가의 예산지원 수준으로는 최저임금법조차 지키지 못한다며 보건복지부와 기획재정부 장관을 검찰에 고발하기까지 했다.

현 정부 들어 정부가 직접 종사자를 고용하는 ‘사회서비스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어린이집과 요양시설만 필수운영사업으로 지정된 데다 방식을 놓고 갑론을박 중이라 아직 갈 길이 멀다.

이숙진 여성가족부 차관은 젠더사회연구소 소장 시절 이 문제에 대해 “공공부문에서 직접고용하거나 민간 위탁 서비스에 대한 정부 부담수준을 현실화해 서비스 질을 담보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황덕순 청와대 고용노동비서관도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시절 작성한 ‘돌봄노동자의 특성과 근로조건’ 보고서에서 “적절한 보수, 주당 노동시간 설정, 유급휴가 부여 등 전문직업화를 하면 그 일자리에서도 경력이 형성되고 여성일자리로 여기는 고정관념과 싸울 수 있게 된다”며 ‘돌봄노동 전문직업화’를 주장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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