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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도로 묵”이라 얕잡기엔 너무 맛난 생선, 도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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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중순 지금이 절정기… 조금 지나면 알 딱딱해 맛 떨어져
값싸고 푸짐하게 즐길 수 있는 ‘서민의 미식 물고기’

조선일보

겨울 대표 별미 생선 도루묵이 지금 절정의 맛이다. 조금만 지나면 알이 너무 딱딱해 맛이 떨어진다./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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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거의 모든 생선이 맛있어지는 철이지만, 12월 중순 현재 가장 맛있으면서도 비싸지 않게 즐길 수 있는 생선을 꼽으라면 단연 도루묵이다. 17일 서울 외발산동 강서수산시장에 나가보니 아랫배가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알을 통통하게 밴 도루묵이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20cm가 넘는 큼직한 놈들도 10마리 1만5000원이면 맛볼 수 있었다. 좀 작은 녀석들은 15마리에 1만5000원이었다. 도루묵은 최대 25~26cm까지 자란다.

◇선조가 "도로 묵이라 불러라"라고 했다고?

도루묵은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생선 중 하나이다. 도루묵이란 이름이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 알려진 재미난 일화 때문이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떠났다. 피난 간 지역에 살던 백성 하나가 임금에게 생선을 올렸다. 피난길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배를 곪던 선조는 생선이 너무나 맛있었다. 왕이 고기 이름을 묻자 ‘묵’이라고 백성이 답했다. 선조는 "맛에 비해 이름이 보잘 것 없다"며 "이름을 ‘은어(銀魚)’로 고치라"고 명했다.

전란이 끝나고 궁궐로 돌아온 선조가 이제는 은어가 된 묵이 생각나 찾았다. 수라상에 오른 생선을 다시 먹어보니 예전 맛이 아니었다. 실망한 선조는 "도로 묵이라 불러라" 명했다. 이 이야기가 퍼지면서 ‘도루’가 묵 앞에 붙어 도루묵이 됐다는 이야기다.

도루묵이란 이름과 그 유래가 처음 등장하는 건 선조 때가 맞지만, 선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믿기엔 의심쩍은 구석이 많다. 도루묵이란 말은 선조 때 관료이자 학자였던 이식(李植·1584∼1647년)이 지은 ‘환목어(還目魚·도루묵)’이란 제목의 시에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이 시에는 ‘왕’이라고만 나올 뿐 선조를 지목하진 않는다. 게다가 선조는 도루묵이 잡히는 강원도나 함경도가 아닌 평안도 의주로 몽진했다.

정조 때 문신 이의봉(李義鳳)이 편찬한 어학사전 ‘고금석림(古今釋林)’에는 고려의 왕이 동천(東遷)했을 때 목어를 맛본 뒤 은어로 고쳐 부르라고 했다가 환도 후 그리워 다시 먹어보니 맛이 없어 다시 목어로 부르라 하여 도루묵이 됐다고 전한다. 한반도 동쪽으로 갔다는 점에선 선조 어원설보다 설득력이 있지만 고려의 어느 왕이 실제로 갔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함경도에서 은어가 났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은어가 잡혔던 기록이 있다. 여기서 은어가 지금의 도루묵이다. 서유구(徐有榘)는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서 ‘배가 희게 빛나 운모가루를 붙여놓은 것처럼 보여 본토박이들이 은어라고 부른다’고 적었다. 요즘 ‘수박향의 생선’으로 유명한 은어는 과거 은구어(銀口魚)라고 불렀다.

◇알이 배에 꽉 찾으되 삐져 나오기 직전 가장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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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수산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도루묵. 하얗다못해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배를 보면 왜 옛날 사람들이 은어라고 불렀는지 알 만하다. 배에 알이 가득하지만 밖으로 삐져나오지 않은 상태, 이때 도루묵 맛이 가장 좋다./김성윤 기자


도루묵이란 이름이 선조 때문에 붙여졌다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도루묵이 은어라고 부를 정도로 맛있는 생선은 아니란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도루묵이 겨울에 제철인 건 산란을 앞두고 잔뜩 품고 있는 알이 별미라는 것인데, 고무 알맹이를 씹는 듯 딱딱할 뿐 특별히 맛있었던 적이 없었다. 게다가 알로 영양이 빠지면서 살은 푸석했다.

강서수산시장 ‘일흥수산’ 주인은 "그동안 먹은 도루묵은 알이 가득 들어있었냐"고 물었다. "알이 차다 못해 몸밖으로 삐져나올 정도였다"고 하자, "가장 맛있는 절정기를 넘긴 도루묵만 드셔봤구만"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도루묵 철은 11월 중순부터 산란이 시작되기 직전인 1월 말까지예요. 도루묵은 알이 별미라고 해서 알이 가장 많을 때가 제철로 흔히 알지만, 그때는 이미 알이 영글어서 딱딱해져 맛이 떨어져요. 알을 맛있게 드시려면 12월 중순 그러니까 요즘 도루묵이 맛있지요. 알이 배에 가득 찼으되 터지거나 삐져나오진 않은 도루묵을 골라 드세요. 올해는 12월 말까지가 먹을 만할 듯해요."

일흥수산 주인의 말을 확인하고자 도루묵 10마리를 일흥수산에서 구입해 2층 ‘갯마을’ 식당에 가서 구워달라고 했다. 노릇노릇 구운 도루묵 다섯 마리가 접시에 담겨 나왔다. 열을 받아 구워지는 과정에서 뱃속 알이 팽창해 터져나와 있었다.

도루묵 한 마리를 대가리와 꼬리를 잡아 들고는 알부터 한입 베어물었다. 알들을 감싼 끈적한 점액질이 모짜렐라 치즈처럼 쭉 늘어났다. 산마를 먹은 듯 입술과 입안이 기분 좋게 미끌미끌해졌다. 알을 씹어봤다. 어라, 고무처럼 탱탱하게 이를 튕겨내나 싶더니만 이내 톡톡 부드럽게 터진다. 날치알과 비슷하지만 더 강렬한 식감이다. 이어 담백한 감칠맛이 입안에 퍼졌다. 여태 먹어본 도루묵 알과는 달랐다. 눈처럼 하얗고 결이 고운 생선살은 아직 영양이 완전히 알들에게 빼앗기지 않았는지 촉촉하고 부드럽다. 혀에서 눈 녹듯 녹아내리는 듯했다. 구이뿐 아니라 조림, 찌개도 맛있었다.

선조 아니 어떤 왕이었는진 모르지만, 피난 가서는 가장 맛있을 때 잡은 도루묵을 바로 맛봐서 그렇게 맛있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너무 늦게 잡은 도루묵을 맛본 건 아니었을까. 지방 관리들이 최고의 도루묵을 진상한답시고 알이 너무 커지고 딱딱해을 때 잡아서 올리진 않았을까. ‘도루묵은 은어라고 불리기에 충분히 맛있는 생선이구나’ 생각하며 강서수산시장을 나왔다.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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