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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ILO 가입후 27년 비준 미룬 핵심협약…한-EU FTA 분쟁 불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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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FTA에도 문제 될 가능성…정부 "협상력 위해서도 비준 필요"

연합뉴스

EU 깃발
[EU 제공]



(세종=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유럽연합(EU)이 한-EU 자유무역협정(FTA)에 명시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한국을 상대로 분쟁해결 절차에 돌입한 것은 ILO 핵심협약 비준을 더는 미루기 어려워진 국제적 환경을 잘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고용노동부는 17일 EU가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 의무를 명시한 한-EU FTA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장(章)'의 분쟁해결 절차인 정부간 협의를 공식 요청한 사실을 공개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EU와 정부간 실무 협의에 나설 준비에 착수했다. 협의는 내년 1월 시작할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정부간 협의로 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양측 정부 고위공무원으로 구성된 '무역과 지속가능발전위원회'가 소집되고 위원회 논의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전문가 패널이 구성돼 권고 사항을 담은 보고서를 채택하게 된다. 마지막 절차까지 가면 8개월 정도 걸릴 수 있다.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장은 양측의 지속가능한 무역을 위한 노동·환경 기준에 관한 것으로, 1998년 ILO 총회에서 채택한 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 선언 원칙을 국내 법·관행에서 실현하고 ILO 핵심협약과 최신 협약 비준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계적으로 자유무역이 확산하면서 소비자가 외국 상품을 구매할 때 국제적인 노동·환경 기준에 따라 생산됐는지도 고려하는 경향을 반영한 규정이라는 게 노동부의 설명이다.

노동부는 "우리나라 기업이 노동에 대한 기대 규범 수준이 높은 유럽 국가로 상품을 수출하는 데도 노동기본권을 다루는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세계 각국이 체결하는 FTA의 최근 추세가 노동 기준을 강화하고 이를 경제 제재가 가능한 일반 분쟁해결 절차와 연계하고 있어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를 풀지 않으면 다른 FTA에서도 문제가 될 것으로 정부는 우려한다.

한국이 체결한 FTA 16개 가운데 9개가 이미 노동 조항을 포함하고 있고 현재 FTA 협상을 진행 중인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를 포함한 남미 국가 중에도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곳은 브라질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동부는 "FTA 협상의 교섭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도 우리나라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완료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2011년 한-EU FTA 발효 이후 EU는 한국에 ILO 핵심협약 비준을 계속 요구했으나 비준이 미뤄지자 7년 만에 분쟁해결 절차에 돌입했다. EU가 FTA 체결 상대국에 대해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장의 분쟁해결 절차에 들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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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협약 비준 공익위원 권고안 발표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에 따라 한국은 국제적으로 다시 한번 '노동권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쓸 상황이 됐다.

노동부는 "분쟁해결 절차 개시 이후에도 ILO 핵심협약 비준이 지연되는 경우 EU는 문제 제기의 강도를 높일 것으로 예상되며 이에 따른 국가적 위상 실추 등도 초래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은 ILO 정식 회원국이 된 지 27년이나 지났지만, ILO 핵심협약 8개 중 4개를 아직 비준하지 않은 상태다. 이들 핵심협약 가운데 결사의 자유에 관한 제87호와 단결권에 관한 제98호는 노동조합 가입·활동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ILO 회원국이 결사의 자유 원칙을 지키는지 감시하는 ILO 산하 '결사의 자유 위원회'도 국내 노동단체가 제기한 진정을 계기로 정부에 ILO 핵심협약 비준을 여러 차례 촉구했다.

역대 정부는 ILO에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했지만, 이를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경영계가 '국내외 노동 현실'을 이유로 ILO 핵심협약 비준에 강하게 반대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경영계는 ILO 핵심협약 비준과 이에 따른 국내 노동관계법 개정이 이뤄질 경우 산업 현장에서 노조의 힘이 지나치게 커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를 논의하는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 공익위원들이 지난달 20일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국내법 개정 권고안을 발표했을 때도 우려는 불거졌다.

공익위원 권고안대로 해고자와 실업자의 노조 가입·활동과 공무원 노조 가입에 대한 제한을 풀 경우 '노조 천국'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러나 ILO 핵심협약 비준에 대한 우려에는 과장된 부분이 많은 것으로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노사관계 개선위원회 공익위원들은 우려가 확산하자 지난 5일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오해 바로잡기에 나섰다.

'공무원 노조 가입 제한을 풀면 소방관이 파업해 불이 나도 끌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노조 가입 허용과 파업 허용은 별개 사안이며 현행 공무원노조법상 공무원은 일체 파업이 금지돼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국제기준인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는 데 대해서도 우려가 확산하는 것은 노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신뢰·타협보다는 불신·갈등으로 치닫는 노사관계 문화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영계는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더라도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경영계는 노사관계 개선위원회에서 단체협약 유효 기간 확대, 부당노동행위의 형사 처벌 제외, 직장 점거 파업 금지, 대체근로 허용 등을 요구 사항으로 제출했고 이에 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ljglor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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