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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개혁개방 40년…목숨걸고 찍은 18개 손도장이 중국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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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개혁개방 촉발시킨 샤오강촌

공동경작 대신 개별영농의 길 선택

발각 땐 처형 각오하고 비밀각서

중국 GDP 226배 뛰었지만 빈부차

젊은이 떠난 샤오강촌 다시 쇠락

[예영준의 차이 나는 차이나] 중국 개혁개방의 원점 샤오강촌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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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바꾼 18개의 손도장.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개별영농을 시작한 안후이성 샤오강촌 농민 18명의 비밀각서가 아직 보존되어 내려온다. 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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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토를 집집마다 나눈다. 만일 주동자가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되면 남은 사람들이 그의 자녀가 18세가 될 때까지 돌봐준다.”
1978년 12월 어느 날 안후이(安徽)성 샤오강(小崗)촌 농민 18명이 비밀리에 서명한 각서의 내용이다.

당시 중국의 농민들이 땅을 나눠 갖는다는 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도시의 토지는 국유로 하고, 농지는 농민의 집체소유로 하되 공동으로 농사지어 똑같이 나눠 갖는 ‘인민공사’를 사회주의 중국의 근간으로 삼았다.

샤오강촌 농민들은 이에 정면으로 반하는 ‘다바오간(大包幹)’, 즉 땅과 농기구를 나눠 각자 농사를 지은 뒤 의무할당량을 인민공사에 내고 남은 수확을 각자가 갖는 개별영농의 길을 선택했다. 이는 훗날 공산당과 정부에 의해 공인됨으로써 중국 농촌 개혁의 출발점이 됐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절박함이 빚은 결단
샤오강촌에는 당시의 농민 18명 가운데 10명이 생존해 있다. 그 중 한 사람인 관유장(關友江ㆍ72)은 “당시로선 상상도 못할 일을 했다”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먹고 살아갈 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토질이 척박하고 수확이 부족해 촌민들은 인근 마을로 가 걸식을 했다. 게다가 1978년 최악의 가뭄이 덮쳤다. 농민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란 절박함으로 각서에 손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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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각서에 서명한 샤오강촌 농민 18명 중 한 사람인 관유장. 뒤에 보이는 액자는 2008년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관유장이 경영하는 식당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 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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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니 그들의 가난은 땅과 가뭄 탓이 아니었다. 인민공사에서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게으름 피우던 농민들은 개별영농을 시작한 이후 너나 없이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부지런히 일했다는 게 관유장의 회고다. 이듬해 수확량은 그 전 5년 간 소출을 합친 것과 맞먹었다.

거짓말 같은 현실은 소문이 되어 퍼져나갔다. 개별영농을 부정하는 당 중앙의 견해가 인민일보에 실렸지만 당시 안후이성 제1서기 완리(萬里)는 “나라와 인민에 도움 되는 일을 왜 못하냐. 일이 잘못되면 내가 책임진다”며 샤오강 농민을 옹호했다.

마침내 중국 정부는 1982년 1월 ‘제1호 문건’을 통해 샤오강촌의 방식이 사회주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85년에는 인민공사가 폐지됐다. 덩샤오핑(鄧小平)은 훗날 “중국의 개혁은 농촌에서 시작됐고, 농촌 개혁은 안후이에서 시작됐다”며 샤오강촌의 선구자적 역할을 인정했다.

이후 샤오강촌은 장쩌민(江澤民)ㆍ후진타오(胡錦濤)ㆍ시진핑(習近平) 등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이 다녀가는 필수 코스가 됐다.

개혁개방이 이룬 기적... 40년 만에 GDP 226배
샤오강촌의 도전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이 18일로 40주년을 맞는다. 중국은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약칭 11기 3중전회)가 개막한 1978년 이 날을 기점으로 삼는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 2년 간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당시 부총리 덩샤오핑은 닷새간 계속된 3중전회를 통해 개혁개방으로의 노선 전환을 공식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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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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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40년 동안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위안화 기준으로는 226배, 달러화 기준으로는 57배 성장을 이루며 2011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1949년 공산정권 수립 후 29년 간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빈곤국가 중국은 그 사이 ‘세계의 공장’을 거쳐 지금은 알리바바 그룹의 온라인 쇼핑 이벤트에 하루 35조원을 쓰는 ‘세계의 시장’으로 변신했다.

연평균 9.5%의 고속성장에 힘입어 1인당 가처분 소득이 40년 사이 약 23배 늘어난 결과다. 세계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8년 1.8%에 불과했지만 2017년 18.2%로 높아졌다. 구매력 기준의 경제 규모는 2014년에 이미 미국을 넘어선 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이 추정했다.

중국의 개혁 전략은 ‘점-선-면’ 전략으로 요약된다. 광둥성 선전을 비롯한 남부 지역 항구도시를 먼저 개방해 특구 4곳을 건설한 뒤 이를 동남 연해의 해안지역 전체로 잇고 다시 이를 내륙으로 확장하는 전략을 말한다.

부자도시 선전 vs 시골마을 샤오강
지난 8일 찾아가 본 샤오강촌은 가난한 중국 농촌의 전형적인 모습에서 크게 못 벗어난 상태였다. 거리에선 젊은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40년 전 18명의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나눈 농토를 뒤로 하고 젊은이들은 외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소득 증대를 위해 한 때 포도 농장을 조성하고 와인 생산을 시작하기도 했지만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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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강촌의 모습. 간선도로 변의 주택들이 말끔히 단장되어 있지만 젊은이들이 외지로 떠나 한산한 모습이다. [사진 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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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농촌 개혁 1번지란 명성을 보고 하루 1000여명씩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겨냥해 관광진흥책을 세웠다. 하지만 별다른 관광 자원이 없어 이 역시 한계가 있다. ‘다바오간’으로 먹는 문제를 해결(원바오ㆍ溫飽)하고 일찌감치 가난 탈출에 성공했지만 부유한 마을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샤오강촌의 현실은 중국 개혁개방의 또 다른 원점인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의 성공신화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40년 전의 선전은 인구 3만의 한적한 어촌이었다. 샤오강촌의 농민들이 걸식에 나섰듯 이렇다 할 먹고 살거리가 없는 광둥 주민들 역시 목숨을 걸고 철책을 넘어 인근 홍콩으로 탈출했다. 철책 이쪽은 허허벌판인데 건너편 홍콩은 마천루가 솟은 신천지였기 때문이다.

샤오강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정부 방침을 거스르며 개혁의 길을 스스로 찾았다면, 개혁개방 이후 최초의 특구로 개발된 선전은 정부가 모든 자원과 역량을 쏟아부어 성공을 일궈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인구 2700만명에 1인당 GRDP(역내 총생산) 2만5000달러의 중국 최고 부자도시가 된 지금의 선전은 40년 전의 모습을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는 초현대식 도시다.

개혁개방의 남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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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개별영농을 결의한 비밀각서에 서명한 샤오강촌의 농민 18명의 당시 모습. [사진 샤오강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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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과 샤오강의 격차는 중국 개혁개방 40년의 성과와 한계, 남은 과제를 축약해 보여준다. 도농 격차, 내륙과 연해(沿海)간의 지역 격차, 먼저 부자가 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빈부 격차는 개혁개방 40년이 남긴 그림자다.

중국의 지니 계수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0.467이다.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정도가 심하다는 뜻이다. 지니계수가 0.4에 이르면 ‘사회 불안을 초래할 수 있는 수준’으로, 0.5가 되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수준’으로 간주된다. ‘불혹(不惑)’을 맞은 중국 개혁개방의 다음 단계가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샤오강촌(안후이)·선전(광둥)=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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