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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겨울 들판 점령한 '공룡알'…농민들 "쌀보다 짭짤한 지푸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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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한기 효자? 牛사료로 팔아 1년 농사 수익의 20%
농민들 "환경오염 알지만 우리 형편에 포기 못 해"
전문가들 "쌀값 인상, 친환경 비료 제공 등 대책 세워야"

지난 8일 오전 전북 김제평야를 가로지르는 23번 국도. 김제시 성덕면을 지나 익산시까지 40여 분, 승용차로 약 35㎞를 달리는 동안 양옆으로 펼쳐진 들판에는 하얀 뭉치들이 끝없이 흩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차곡차곡 쌓아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흩뿌려져 있어 멀리서 보니 백로 떼가 앉은 것 같았다. 차에서 내려 가까이 가 봤더니 크기는 가로 1m·세로 1m·너비 1m, 무게만 500kg에 이른다. 마치 커다란 마시멜로 같았다. 지나던 한 농민은 "공룡알이야. 공룡알~"이라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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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전북 익산시 논에 펼쳐져 있는 하얀 ‘공룡알’의 모습./ 최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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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면 전국 논마다 이른바 ‘공룡알’들이 넘쳐난다. 소 사료로 팔기 위해 추수 후 남은 볏짚을 모아 압축한 볏짚더미들이다. 하얀 비닐로 감싸놓아 농촌에선 흔히 ‘공룡알’이라고 부른다. 정식명칭은 ‘곤포(梱包·Baling) 사일리지(Silage)’다. 농민 김인곤(61·전북 김제시 백구면)씨는 "갈수록 공룡알이 많아지고 있다. 작년보다 2배가 넘는다"며 "형편이 오그라드니 이거라도 팔겠다고 다들 한겨울에 논에서 짚단을 묶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푸라기라도 팔아 돈벌이 충당해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소 사료로 쓰인 볏짚은 지난 2016년 174만 4000t에서 작년 208만 6000t으로 19.6% 늘었다. 지난 한 해 전국에서 공룡알 417만 2000개가 만들어진 셈이다.

공룡알은 1개당 4만 5000~5만 2000원 선에서 거래되고, 이 중 2만원 가량이 농민 수익이다. 쌀 1가마니(80kg)를 팔아서 남는 수익의 절반 수준인 것이다. 김제시 농업기술센터에 따르면, 논 1필지(1200평·4000㎡)에서 수확할 수 있는 쌀은 약 2000kg, 25가마니로, 순수익은 100만~150만원 수준이다. 같은 크기 논에서 겨울철 만들 수 있는 공룡알은 10개, 1년 내내 농사 지어 버는 돈의 1/5을 벌 수 있는 셈이다. 농민 입장에서는 농한기(農閑期) 짭짤한 부수입이다.

농민 이모(66)씨는 김제시에서 14만 4000평 규모의 벼농사를 짓고 있다. 올해 벼농사로 번 돈은 1필지에 100만원, 총 1억 2000만원 가량을 벌었다. 이씨는 지난달부터 최근까지 공룡알 1200여 개를 만들어 모두 2400만원의 수익을 얻었다. 이씨는 "공룡알도 인건비 등은 들어가지만 벼농사에 비해 수익률이 엄청나게 좋은 편"이라고 했다. 익산시 농민 황진원(59)씨는 "최근 쌀값이 꽤 올랐는데도 소 사료로 쓰는 볏짚 모아 파는 것보다 벼농사 벌이가 그만큼 시원찮다는 이야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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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전북 익산시에 있는 한 논에서 농부 김경수씨가 공룡알 옆에 서있다. /최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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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사육수 최대 기록하자 지푸라기 수요도 늘어
농민들이 공룡알 만들기에 나서는 이유는 뭘까. 결론부터 말하면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전북 익산시 농민 김경수(60)씨는 "전국 곳곳에서 엄청 사 간다"며 "김제 논에서 만들어진 공룡알이 경상도도 가고, 충청도도 간다"고 했다. 김씨는 "몇년 전만해도 추수가 끝날 때쯤이면 중개상들이 찾아와 소 사료가 필요한 농가(판매처)와 연결해 줬는데, 최근에는 아예 중개상들이 공룡알을 수거해서 가져가기도 한다"며 "공룡알 유통이 중개, 운반, 물류 등으로 세분화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배경에는 축산업이 최근 호황인 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현재 한우·육우 사육두수는 313만4000마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600㎏ 암소 기준으로 한우 산지 가격은 10월 말 현재 579만원이다. 1년 전보다 26만원(4.7%) 올랐다. 소값이 뛰니 사육두수도 늘고 있는 것이다. 서상원 황등농협 영농조합장은 "최근 귀농(歸農) 등으로 농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수익이 좋은 소 사육 농사에 뛰어들고 있다"면서 "소가 많아지니 사료가 많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소 한 마리가 연간 먹는 공룡알은 8~9개 수준. 소 100마리를 사육하는 축산농가의 경우 1년 동안 1000여 개 공룡알이 필요한 것이다. 국립축산과학원 최기춘 농업연구사는 "국내엔 초지(草地)가 없고, 수입 사료는 쿼터제로 물량이 많지 않다"면서 "소 사육 농가가 손쉽게 조달할 수 있는 사료가 볏짚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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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전북 익산시 한 축가에서 소들이 ‘공룡알’ 형태로 공급된 볏짚을 먹고 있다./ 최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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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짚 판 자리엔 화학비료 사용…토양오염·녹조 심화 우려도
공룡알이 주는 부작용도 있다. 볏짚이 팔려나가면서 토양은 오히려 오염된다는 것이다. 김제시에서 만난 정모(70)씨는 "과거엔 추수 후 볏짚은 자연비료로 땅에 환원시켰는데, 소 사료로 쓰이고부터는 논에 뿌리는 화학비료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공룡알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추수가 끝난 뒤 남은 볏짚은 주로 자연 거름으로 쓰였다. 논에 넓게 펴 놓으면 흙에 유기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이듬해 농사를 짓기 위해 질 좋은 땅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 사료로 팔려나가면서부터 논에는 영양분 부족 현상이 생겼고, 그 빈자리를 화학비료가 대신하고 있다는 게 농민들의 얘기다.

군산대 해양생물공학과 노정례 교수는 "화학비료는 60%가량만 땅에 흡수되고, 나머지는 빗물 등에 씻겨 인근 하천 등으로 흘러든다"면서 "화학비료에 함유된 인 성분은 주변 하천 등에 녹조 현상을 일으키는 주요 성분"이라고 했다. 노 교수는 "늘 문제가 되고 있는 새만금호 녹조 현상도 김제평야의 화학비료가 많아지는 것이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고 말했다. 화학비료는 쌀 수확량에도 영향을 미친다. 농민 한모(65)씨는 "토양 유기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면 농작물 수확량은 약 15%가량 떨어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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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충남 천안시의 논에도 ‘공룡알’이 흩어져 있다./ 최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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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자 지방자치단체는 화학비료 남용을 막겠다며 저마다 대책을 내놓고 있다. 김제시와 익산시는 짚을 토양에 환원하는 농가에 대해 ‘지력(地力) 향상 지원금’으로 1필지 당 8만원씩을 주고 있다.

하지만 농민들은 "먹기 살기 어려운데 환경 지키겠다고 눈앞에 돈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한다. 한국농수산대학교 식량작물학과 박광호 교수는 "농민들이 벼 지푸라기 모아서 팔지 않고도 생활이 안정화될 수 있도록 쌀값을 현실화하거나 친환경 비료를 보급해 환경오염을 막는 등의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익산=최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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