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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만물상] 과학자에 대한 정치적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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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의 치아 수가 같다는 것을 처음 밝힌 사람은 16세기 벨기에 의사 안드레아 베살리우스였다. 그때까지 다들 남자의 이가 여자보다 많다고 믿었다. 기원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말한 탓이 컸다. 남녀의 치아 수를 세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을 2000년 동안이나 외면하고 있었다. 과학자는 '모두가 믿어온 것'을 믿는 게 아니라 베살리우스처럼 관찰과 실험 결과만 믿는다.

▶산소를 발견한 '화학의 아버지'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혁명 때 쉰한 살로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겉으론 그가 대주주로 있던 세금관리조합의 비리가 죄목이었다. 그러나 체포조 선두에 숙적(宿敵) 장 폴 마라가 있었다. 마라의 논문을 라부아지에가 혹평해 프랑스 아카데미 입회가 좌절된 악연이 있었다. 라부아지에가 죽자 수학자 라그랑주는 "그의 목을 치는 데는 몇 초밖에 안 걸리지만, 그런 두뇌를 얻으려면 100년 넘게 걸릴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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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집권 후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독일 물리학'이 아니라며 모두 부정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숱한 과학자가 망명길에 올랐다.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질소비료 생산 공정을 발명해 인류의 기아를 해결했다는 찬사와 함께 노벨상을 받았다. 1차 대전 때 독가스도 개발한 그는 '뼛속까지 독일인'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추방했다. 유럽을 떠돌던 하버는 객지 호텔에서 급사했다.

▶정부가 신성철 카이스트 총장을 횡령·배임 혐의로 고발하고 이사회에 직무 정지까지 요청했다. 그러자 정부가 문제 삼은 미국 연구소가 직접 해명 편지를 보내고 직무 정지 반대 서명에 800명 넘는 과학자가 나섰다. 어제 이사회는 시시비비가 가려질 때까지 기다려보자며 결론을 유보했다. 이에 앞서 손상혁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총장은 한 달 넘게 이어진 감사 끝에 사퇴했다. 그 역시 26년간 미국 버지니아대 교수로 일하다가 나라의 부름에 응한 사람이었다.

▶이 정부 들어 중도 사퇴한 정부 출연 연구 기관과 과학기술원 기관장이 11명에 이른다. 정권 교체기마다 투서가 나도는 과학계 풍토도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 과학 학술지 '네이처'는 이를 두고 "한국 과학자들은 일련의 사태를 과학계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숙청으로 생각한다"고 보도했다. 과학에도 당(黨)이 있나. 하다못해 북한 김정은도 과학자를 업어주며 떠받든다. 한국에서는 과학자들까지 숙청을 당한다. 이 블랙리스트도 언젠가는 단죄될 것이다.

[한현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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