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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데스크에서] '혐오 중독'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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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성현 여론독자부 차장


우리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기류를 설명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혐오'다. 남녀와 노소, 빈부(貧富)로 나뉘어 서로를 미워하는 건 물론이고, 재중(在中) 동포와 탈북자에 대해서도 불신과 적의의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이런 혐오 감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신조어가 벌레를 뜻하는 '충(蟲)'이다. 반감을 지닌 대상 뒤에 붙여서 비하와 경멸의 의미를 덧씌운다.

이를테면 아이를 키우는 기혼 여성은 '맘충'이고, 한국 남자들은 '한남충'이다. 학교 급식을 먹는 10대는 '급식충'이고, 반대로 노년층은 틀니를 딱딱거린다고 해서 '틀딱충'으로 부른다. "우리는 우리의 적을 증오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적(敵)이 사라지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말 것"이라는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탄식이 예사롭지 않다.

왜 우리는 서로를 죽자 사자 미워하는 걸까. 증오의 감정을 확산시키는 불쏘시개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면전에서는 입에 담지 못할 비열한 욕설과 험담을 허용하는 익명(匿名)의 온라인 공간이 우선이라면, 당장의 인기를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자극적 언어를 쏟아내는 정치인들의 저열한 셈법이 뒤이을 것이다. 그보다 어려운 건 혐오의 근본적인 발화(發火) 원인을 파악하는 일이다.

과거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지상 과제가 존재하는 사회였다. 이 목표를 공유하는 한 우리는 한울타리 안의 동포이자 가족이었다. 경쟁 상대나 저항의 대상은 선진국이나 소수의 정치군인처럼 울타리 외부에 있었다. 애틋한 그 시절을 향한 향수를 담은 영화가 '국제시장'과 '1987'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목표에 다다른 순간 한국 사회가 과녁 잃은 화살처럼 힘을 잃고 추락한다는 점이야말로 서글픈 역설이다.

구성원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볼 일이 없으니 서로의 모습만 관찰하게 된다. 파이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낙관과 기대가 사라지니 한정된 파이의 큰 조각을 차지할 욕심에만 관심이 쏠린다. 남의 손해가 내 이익이요, 내가 양보하면 남만 좋은 일 시키는 셈이다. 혐오는 저성장 시대의 음울한 초상일 가능성이 높다.

득표를 위해서는 나라 살림을 거덜내도 좋다는 인기 영합주의와 증오를 부추겨서 집권하겠다는 파시즘의 심리도 혐오를 부채질한다. 유럽에서 중도 계열의 기성 정당들이 힘을 잃고 극좌·극우 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진국의 장점만 배우면 좋으련만 실패의 원인과 부작용까지 고스란히 닮아가는 꼴이다. "화성 침공의 위협이 없으면 소련인이 형제라는 걸 설득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러셀의 말처럼 우리는 외교적 갈등이나 군사적 긴장이 있을 때만 단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혐오의 감정을 씻어내기 위해서는 월드컵 개최라도 다시 추진해야 할 판이다.

[김성현 여론독자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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