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대리 元씨의 추운 연말… 휴대폰 3대로 콜 잡고 '길빵' 뛰어도 허탕

댓글 5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세밑 현장 르포] 연말 술자리 줄고 다들 일찍 끝내

콜 겨우 잡고 달려가도 '노쇼' 한숨… 지인에게 명함까지 돌리며 안간힘

조선일보

대리운전 기사들이 쓰는 휴대폰 앱 화면. ‘콜 신청’이 뜨면 1~2초 만에 마감된다. /김지호 기자


지난 10일 밤 11시 서울 공덕동 '먹자골목' 초입. 대리운전 기사 원종철(60)씨가 콜을 요청한 사람에게 10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통화가 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군데 신청해 놓고 먼저 온 기사와 차를 탄 뒤 전화를 받지 않는 고객 같다"고 했다. 서울 서초구에서 마포구까지 지하철을 타고 30분 남짓 달려왔지만 수확이 없었다.

통화를 포기한 원씨는 스마트폰을 켜고 대리 기사용 앱(APP)에 '콜 신청' 문구가 뜨길 기다렸다. 알림음이 들릴 때마다 재빨리 손가락을 움직여봤지만 번번이 콜을 놓쳤다. 그는 "콜이 뜨면 1~2초 만에 다른 기사가 채 간다"며 "요즘 일감이 줄어들어 대리 기사 간 경쟁이 치열해졌다"고 했다. 원씨 주변엔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하는 대리 기사가 4명 더 있었다. 잠시 후 이들 중 한 명이 콜을 잡은 듯 자리를 뜨자 나머지 기사들 사이에선 탄식이 흘러 나왔다.

대리 기사들에게 12월은 '1년 중 특수(特需) 기간'으로 여겨졌다. 늦게까지 술자리를 이어가는 한국식 송년 문화의 혜택을 봤다. 그러나 올해는 성폭력을 폭로하는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운동과 '주 52시간제 도입' 등의 여파로 송년 술자리가 줄었다. 송년회를 점심으로 대체하거나, 술을 곁들이지 않는 회식이 많아진 추세 때문이다. 대리 기사 사이에선 "평년보다도 밥벌이가 어려워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서울 강남구 한 고깃집 사장은 "회식을 해도 대중교통이 다닐 시간에 일찍 끝내는 경우가 많아 대리 기사를 찾는 손님이 없다"고 했다.

조선일보

지난 10일 밤 대리운전 기사 원종철(60)씨가 서울 마포구 공덕동 먹자골목에서 콜을 부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10여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원씨는 “연말에는 여러 업체에 콜을 넣은 다음, 먼저 도착한 기사에게 운전을 맡기고 전화를 받지 않는 ‘노쇼’가 많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서울 강남·종로 등 도심 번화가에서 만난 대리 기사들은 각자 자구책으로 '일거리 한파'에 맞서고 있었다. 21년 차 대리 기사 조모(69)씨는 지난 11일 자정이 가까워지자 서울 종로2가 먹자 골목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대리운전 기사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더 싸게 해줄 테니 지금 출발하자"고 제안했다. 업계 은어로 '길빵'이라는 호객 행위다. 조씨는 "계속 달라붙어 가격 흥정을 하다 보면 욕을 먹기 일쑤"라며 "수십 번 '길빵'해야 손님 1명을 건질 수 있다"고 했다.

14년 경력 대리 기사 김모(63)씨는 지인들에게도 영업을 한다. 대리 기사 명함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돌리는 것이다. 김씨는 "예전엔 '대기업 다녔던 분이 왜 그런 일을 하느냐'는 소리를 듣기 싫어 남몰래 대리를 뛰었지만, 요즘 같은 경기엔 자존심을 세울 여력이 없다"고 했다. 11일 밤 김씨가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태운 손님도 김씨 친구의 친척이었다.

30~40대 전업 대리 기사들은 스마트폰을 서너 대 들고 다니기도 한다. 대리 기사용 앱 여러 개를 동시에 켜놓기 위해서다. 구형 스마트폰 공기계를 구해 포켓 와이파이(휴대용 와이파이 접속 기계)와 연결해서 쓴다. 대리 기사 박모(33)씨는 "대리를 부르는 경로가 다양해져 손님이 분산되다 보니 이렇게 해서라도 콜 배정 확률을 높이려는 것"이라고 했다.

심야 시간 이동 수단이 다양해진 것도 대리 기사 업계엔 위협이다. 승차 거부가 불가능한 '카카오 블랙 택시'와 승차 공유(11인승 승합차) 서비스 '타다'가 젊은 층에서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대리운전비와 가격이 비슷하거나 일반 택시 요금보다 최소 20% 이상 비싸지만 호응을 얻고 있다. 직장인 윤모(31)씨는 "대리 기사비와 기름값, 대리 기사들의 험한 운전 스타일 등을 생각하면 돈을 좀 더 주더라도 프리미엄 택시 등을 타는 게 낫다"고 했다.





[박상현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