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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아무튼, 주말] 인간이 있는 곳에는 친절의 기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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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友야담]

조선일보

어수웅·주말뉴스부장


지난주 이 자리에서 '올해의 책'을 꼽았더니 '올해의 영화'는 무엇이냐는 독자의 질문을 여럿 받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엊그제 극장에서 본 '인생 후르츠'가 먼저 떠오릅니다. 상 받은 예술 영화도, 할리우드 대작 영화도 아닌 90세 할아버지와 87세 할머니의 65년 해로(偕老)를 담은 일본 다큐멘터리.

국어사전은 해로를 '부부가 평생 함께 살며 함께 늙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주지하다시피 흔하면 더 이상 귀하지 않습니다. 함께 살며 함께 늙음. 요즘은 드문 사례죠. 하지만 단지 그뿐만은 아닙니다. 지금의 어떤 20대들이 들으면 기겁할 주인공 할머니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남편 아침 식사 준비가 평생 가장 큰 기쁨이었다, 잘 먹어줘서 늘 고마웠다, 여자는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누우면 안 된다, 여자는 늘 웃어야 한다고 배웠다….

양성평등이 최우선 관심 중 하나인 2018년 대한민국에서 자칫 시대착오로 비난받을 문제적 발언들을 할머니는 늘 방긋방긋 웃으며 말합니다. 참, 공정을 기하기 위해 할아버지의 말과 삶도 병기(倂記)해야겠군요. 늘 할머니에게 존댓말을 쓰고, '내 최고의 여자 친구'라고 소개하며, 몸을 써야 하는 일은 당연히 솔선수범. 봄무·딸기·무화과·토란… 텃밭에서 과일 50종, 채소 70종을 가꾸는 은퇴한 건축가.

며칠 전 국민일보의 설문조사가 잊히지 않습니다. 세대마다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갈등이 뚜렷하게 다르더군요. 노년은 이념 갈등, 중장년은 빈부 갈등인 데 반해 20대는 남녀 갈등. 이 세대 남성 75.9%는 페미니즘을 반대한다고 대답했고, 같은 세대 여성 64%는 지지한다고 답변했죠.

그 격차의 원인과 해결 방법을 이야기하려면 별도의 지면이 필요할 겁니다. 쉬운 일도 아니고요. 하지만 창밖으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지금 톨스토이의 문장을 순서 바꿔 인용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행한 가정은 늘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지만, 행복한 가정은 늘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다. 인용 하나 더.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친절의 기회가 있다."

남성과 여성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것부터. 연말연시, 친절의 기회는 어느 때보다 더 많을 겁니다.

[어수웅·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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