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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세상사는 이야기] 땅에 평화, 우리 마음에도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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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11월 2일 금요일 오후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나에게 아이들이 음식을 먹이고 있다. 데이비드는 스푼에 젤로를 떠서 "아빠, 아" 하고, 예진이는 얼음을 담은 스푼을 들고 "아빠, 아" 한다. 그러다가 한 스푼에 젤로와 얼음을 같이 담아 먹여주기도 한다. 상황이 평범한 것처럼 아이들은 웃고 재잘거린다. 아이들 엄마는 이 모습을 비디오에 담고 있다.

나이 쉰하나인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야 할 내가, 그것도 중요한 이사회 회의가 예정된 날 오후에 음식도 아닌 것을 침대에서 받아먹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고 복잡했다. 나를 20대부터 따라다니던 고혈압이 드디어 나를 심각하게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배에 진통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 주 월요일이었다. 횡격막 바로 아래쪽에서 시작된 진통은 등허리와 어깨 그리고 목 뒤쪽까지 퍼졌다. 화요일엔 회사에 앉아 일을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진통이 심해졌다. 결국 나는 목요일 새벽에 병원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비장 옆에 있는 동맥이 끊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건강 때문에 그리 걱정하지 않았었다. 20대에 고혈압 진단을 받았지만 현대 의학이 충분히 만회해줄 수 있는 컨디션으로 생각했다. 20년이 넘도록 같은 약을 먹으면서 항상 정상 수준을 유지해왔으니까. 먹는 것을 조심하고 운동하면서 건강을 지키라는 의사의 말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웬만한 병에서 현대 의학이 나를 구해줄 수 있을 거라 믿어왔기 때문이다.

나흘 후 병원을 나오면서 나는 내게 꼭 필요한 경고를 받은 것으로 이번 경험을 해석하기로 했다. 그리고 새로 처방받은 약을 열심히 먹고 건강에 신경 쓰기로 다짐했다. 내 몸에 큰 손상 없이 이런 경고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항상 따뜻했던 내 손이 아주 찬물에 씻었을 때처럼 차가워졌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충분히 부드럽게 할 수 있는 말을 날카롭게 내뱉는 일이 잦아졌다. 집에 온 손님, 우리 가족을 아껴주시고 아내가 언니같이 여기는 분에게 무례하게 화를 내기까지 했다. 아내가 이런 일 때문에 나와 크게 싸우고 가출하는 악몽을 꾸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상황이 심각해졌음을 깨달았다.

나를 돌아보는 며칠을 보내면서 나는 내 일상이 많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워낙 일 때문에 숫자에 민감했지만 뜻밖에 입원을 한 후부터는 다른 숫자에 더 신경 쓰게 되었다. 하루에 몇 번씩 재는 혈압, 손목에 차고 있는 핏비트(Fitbit)를 통해 아이폰에 나타나는 맥박 수, 그리고 매일 아침 재는 몸무게. 이 숫자들이 올라가면 불안해져서 손이 더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내 마음에 점점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불안감을 의식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심하게 올라가버린 혈압이 다른 동맥을 끊었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란 의사의 말이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는 것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신앙에서, 또 나의 긍정적인 태도에서 얻었던 평안을 이 일로 잃었던 것이다.

'땅에 평화'는 크리스마스 메시지 중 하나다. 그런데 요즘 내게 더 다급한 것은 나를 안정시켜줄 수 있는 마음의 평화다. 마음의 평화를 잃은 나는 나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괴롭히고 낙담시키는 남편, 아빠, 동료가 되었다. 세상을 더 평화로운 곳으로 만들기 전에 내 마음에 평화가 다시 찾아오도록 나 자신을 다스리고, 그 평화로움을 주위 사람들에게 먼저 나눠줘야겠다. 이를 위해 며칠 동안 기도하며 묵상을 거듭한 내 손은 지금, 전에 그랬듯이 따뜻해졌다. 마음에 평화를 잃은 독자님들도 가장 소중한 평화를,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시기를 바란다.

[신순규 시각장애 월가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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