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매경춘추] 이미지는 힘이 세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얼마 전 학술회의차 홍콩에 다녀왔다. 사전에 주최 측 교수가 아기 적 사진을 보내 달라고 연락해 왔다. 왜 그러나 싶었는데, 참석자를 소개하는 자료집에 사진을 실었다. 미국, 프랑스, 티베트 등에서 온 학자들의 어린 시절이 흥미로웠다. 사진은 회의 뒤 저녁 시간에도 단연 인기 메뉴였다. 저마다 사연 많은 고향과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에 어쩌다 찍어둔 사진이 여태껏 남아 참신한 스토리텔링이 됐다.

사진은 기록이자 기억이다. 우리 선조가 남긴 기록은 자랑스럽다. 유네스코도 이를 높이 기려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조선왕조의궤' 등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그중 왕실 행사를 남긴 의궤는 글과 그림으로 기록됐다. 반차, 건축, 복식, 악기, 의장 등 다양한 내용이 그림으로 남았다. 특히 의례 행렬을 그린 반차도는 세밀하고 사실적이어서 백미로 꼽힌다.

이미지는 힘이 세다. 반차도 덕분에 우리는 수백 년 전 의례가 얼마나 품격이 높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게 됐다. 그렇지 않았다면 글로 된 설명을 재구성하느라 진땀깨나 흘렸을 것이다. 카메라가 없던 시절에 정성을 다한 그림이 기록으로 전해졌다. 기록은 기억이 되고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됐다.

이제 카메라는 흔하디흔해졌다. 멈춘 사진은 물론 움직이는 영상을 찍는 일도 쉬워졌다. 그러나 영상 기록에 대한 우리 태도는 아쉽기 짝이 없다. 대학만 봐도 그렇다. 독창적 행사가 줄을 잇는다. 초청 강연, 학술회의, 문화 공연, 봉사활동 등 어느 기관이든 그 안에서만 벌어지는 '사건'들이 있을 터. 그런데도 이를 영상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은 그저 그렇다.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있기는 하지만 영상 기록이 의무는 아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사건'들을 촬영하고 남겨야 한다. 영상 파일을 한군데로 모으는 시스템을 만들고, 기관끼리 연결해 필요에 따라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도서관은 그저 책을 빌려주는 기능을 넘어 영상 콘텐츠를 수집·정리·해석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지금 찍는 '영상 의궤'는 머지않은 미래에 힘센 기억, 역사, 문화, 스토리텔링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임대근 한국외국어대 교수·아시아문화콘텐츠연구소 대표]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