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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책과 미래] 지하철 詩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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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때때로 세상 전체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아홉 살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열일곱 살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미소를 던졌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사랑의 화살'을 맞은 단테가 연인한테 시를 바치려 하면서 역사의 궤도가 바뀐다. 단테는 문어인 라틴어로밖에 시를 쓰지 못했는데 베아트리체는 구어인 토스카나 말밖에 읽을 줄 몰랐던 것이다.

언문일치라는 인류사적 도약이 이로부터 시작된다. 언문일치는 말과 글을 하나로 만드는 일이 아니다. 언문일치는 차라리 라틴어나 한자 같은 문어에 맞춰 구어를 다시 축조하는 일에 가깝다. 토스카나 말로 시를 쓰려고 결심한 단테는 곧장 이 문제를 알아챈다. 구어를 갖고는 사랑을 격에 맞게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음속 연정을 어찌 아무 말로 전하겠는가. 고매하게 타오르는 마음을 그 높이 그대로, 기이하게 회오리치는 정열을 그 문양 그대로 전할 수 없다면, 사랑의 시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베아트리체한테 시를 보내려고 펜을 들고 종이 앞에 앉으면 영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우아하고 심오하고 진리를 담는 데 부족함이 없던 라틴어를 버리고 시정의 언어로 글을 쓰는 건 아주 어려운 과제였다. 직설적 표현만 가능한 구어 자체를 라틴어의 표현 수준으로 갈고닦아야만 단 한 줄이라도 시를 쓸 수 있었다. 단테는 입말을 글에 맞도록, 즉 고급한 사유가 가능하도록 끝없이 정련하는 임무를 기꺼이 떠안는다. '신곡'이 그 대답이다. 페트라르카가 임무를 이어받아 '칸초니에레'를 쓰면서 비로소 우아한 이탈리아어가 탄생한다.

한국어도 같은 궤적을 거쳤다. 김소월 정지용 백석 서정주 김수영 등의 시인이 '한국어 만들기' 임무를 수행한다. 김소월은 외국 시를 번역하면서 한국어를 쪼고 다듬어 '진달래꽃'에 이르렀고, 정지용은 영문학 공부를 바탕 삼아 한국어가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고양했으며, 백석은 사랑을 길잡이 삼아 평안도 말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서정주는 친일 문학자였으나 '부족 언어의 마술사'로 한국어에 다채로운 표현의 힘을 부여했고, 김수영은 자유의 정신을 담을 수 있을 만큼 짙은 사유의 농도를 한국어에 응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언어는 우아하게 생각하고 심오하게 느낄 수 있도록 훈련돼야 한다. 한국 현대시 전체가 모두 이 일에 복무해왔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적힌 시들을 틈날 때마다 읽는다. 좋은 시도 많지만, 속된 시가 아직 너무 많다. 한국어를 아는 한 외국 학생이 의아해서 물어볼 지경이다. 시민 참여도 좋지만, 공공장소에 게시되는 시는 더 신중하게 선별될 필요가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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